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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둥의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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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자 1990-08-19
설교 분류 기타
설교 본문 마태복음 5장 38~42절 
extra_vars6 ./pds/board/33/files/doc/900819-27. 세 가지 차원의 행동원리.hwp

27. 세 가지 차원의 행동원리

마태복음 5장 38~4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히여 속옷을 가지고자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5:39~40) 

 사람은 누구나 어떤 충동이나 동기에 의해서 행동 반응을 나타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차원에서 행동 반응을 나타내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공, 실패가 결정되며 나아가서 운명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빅토르 위고의 작품「레미 제라블」에서 장발장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여 빵 한 조각을 훔치다 19년 형을 받고 나온 다음 어느 누구도 이 전과자를 받아주지 않고 방황하던 차에 밀리엘이라는 성직자 사교(司敎)의 집에서 식사대접을 잘 받고 밀리엘 사교의 좋은 방에서 잠을 자는데 눈앞에 비싼 은촛대가 보여 훔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해 마침내 둘 중에 하나를 훔쳐가지고 도망가다가 순경한테 체포되어 밀리엘 사교의 집에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장발장은 틀림없이 야단맞고 끌려가 감옥생활을 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뜻밖에도 밀리엘은 “내가 준 것”이라고 순경에게 말할 뿐 아니라“둘 다 주었는데 왜 하나만 가지고 갔느냐?”고 하면서 은촛대를 하나 더 내다 주었습니다. 

 여기서 완악하던 장발장은“진리란 이런 것인가?”하면서 깊은 감동을 받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어 훌륭한 일을 많이 하다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장발장과 밀리엘 사교의 행동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장발장은 눈에 보이는 대로 먹고 싶은 욕망 그대로 행동 반응을 나타내는 인간이었는가 하면 밀리엘 주교는 너무나 불합리해 보일 만큼 행동반응을 나타낸 사람입니다. 장발장의 불합리한 배신적 행동에 대하여 밀리엘은 불합리한 사람의 행동을 보여서 아무도 변화시킬 수 없었던 흉악범을 변화시켜서 새사람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충동이나 동기에 의해서 반응을 나타내며 행동을 하게 되는데 세 가지 차원의 행동 원리가 있습니다. 

 ① 육신의 본능에 의한 행동 반응 

 ② 이성의 판단에 의한 행동 반응 

 ③ 영적 생명에 의한 행동 반응 


1. 육신의 본능에 의한 행동 반응 


 아담과 이브가“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서”본능을 절제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범죄 한 것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본능대로 행동 반응을 나타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술, 담배, 마약을 먹을 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대로 훔치고 약탈하고 육신의 정욕을 참지 못해 아무 여자나 붙들고 강간하고 폭행합니다. 잠시의 증오심을 참지 못해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사단마귀는 지금도 자기 정체를 감쪽같이 숨기고 인간의 본능의 줄을 타고 들어와 범 죄케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식욕, 성욕, 명예욕 등을 통해서 유혹하고 타락시키므로 마귀를 이기고 영적으로 승리의 생활을 하려면 육신의 본능과 욕망을 항상 잘 다스리며 절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2. 이성의 판단에 의한 행동 반응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을 모든 판단의 올바른 기준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에 이성의 판단도 틀릴 때가 많습니다. 

 마리아가 죄 사함 받고 구원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값비싼 나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 드릴 때 계산이 빠르고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행위를 잘못된 것이라고 나무랐습니다. “그것을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면 좋을 텐데 왜 허비하느냐?”고 했습니다. 

 그의 말은 이치에 딱 맞는 말입니다. 한 방울만 발라도 온 방안에 향내가 진동할 텐데 일년 벌어도 사기 어려운 그 비싼 나드 향유를 옥합째 깨뜨려 부으니 낭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 볼 때 그의 판단은 틀렸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고 마리아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은 인간의 이성이나 계산에 의해서 판단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성령의 조명을 받아서 기도해 본 후에 결정해야 됩니다. 더구나 부당한 탐욕이나 육신의 감정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일은 반드시 실패하게 되고 후회하게 됩니다. 


3. 영적 생명에 의한 행동 반응 


 거듭난 신자는 육신의 본능에 의해서 행동 반응을 나타내서도 안 되고 인간의 이성이나 타산에 의해서 행동 반응을 나타내서도 안 됩니다.내 속에 있는 영적 생명에 의해서 반응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이성과 지식의 판단에 의해서 선악을 분별하지 않고 영적 생명이 맑은 양심을 통해서 인도하는 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거듭나지 못한 불신자에게 한 말씀도 아니고 국가를 상대로 한 말씀도 아닙니다. 

 ①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우리 신자들이 남에게 사소한 수치와 망신을 당했을 때도 육신의 본능대로 반응을 나타내서 같이 때리거나 화를 내면서 싸우지 말고 그 이상의 수치와 망신도 참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죄가 없으시지만 침 뱉음을 당하고 뺨을 맞으시면 서도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돌려댈 수 있는 여유를 가지도록 하라는 것이지 국가적으로 북한이 남침해 오는데“어서 오십시오”하고 내버려 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 문자 그대로 한 대 얻어맞고 “더 때려, 더 때려”하라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톨스토이(Tolstoy)는 산상수훈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하면서 나라에 전쟁도 없어야 하고 판사나 경찰을 두는 것까지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인 개인의 생활에 관한 행동윤리이지 국가가 법 집행도 하지 말고 공의를 지키기 위해 권선징악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 불신자에게 해당되는 말도 아닙니다.불신자들은 흔히 산상수훈을 가지고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고 말씀했습니다. 본능을 따라 무질서하게 사는 개나 돼지 같은 인간에게 이런 거룩한 말씀과 교훈을 주면 도리어 싸우자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을 따라 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개인 생활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소한 수치나 인격적인 모욕을 참지 못해 화를 내고 싸우다 보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막히고 영적으로 큰 손상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뺨을 한 대 맞으면 내가 연단 받고 인내심을 키우라는 줄 알고 한두 대 더 맞을 각오를 하고 여유 있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② 속옷을 구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 

 이 말씀도 너무 확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령 네 재산을 많이 사기해 먹은 자에게 남은 재산을 다 가져가라고 내어주라는 뜻도 아니고 이 산상수훈을 이용해서 땀 흘리지 않고 남의 것을 공짜로 빼앗아 가지려는 자에게 그저 주라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기꾼이 속옷을 구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설교를 잘 들었습니다. “목사님, 돈 좀 얼마 주십시오.”하니까 그 목사님이“이 말씀은 당신같이 남의 것을 빼앗아 가지려는 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선을 베푼 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하고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속옷이나 겉옷과 같은 물질 문제들보다 큰 영적 생명에 손상을 입지 않도록 양보하고 손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소한 물질문제로 싸우고 다투면서 기도가 막히고 심령에 상처입지 말고 속옷을 달라면 겉옷까지 줄 여유 있는 마음을 가지고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국 어느 공원 쓰레기 더미에는 큰 백곰이 나타나서 먹이를 다 주워 먹곤 하는데 얼마나 힘이 센지 다른 짐승이나 사람이 얼씬도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그마한 스컹크라는 고슴도치 같은 짐승이 있는데 이놈은 와서 먹어도 웅얼거리면서 그냥 먹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입니다. 이 스컹크를 건드리면 고약한 냄새가 나는데 그 냄새가 몇 달씩 가기 때문에 건드리지 않고 양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작은 이해관계로 심령에 상처입지 않도록 양보해야 됩니다. 

 집주인과 셋방살이 하는 사람 간에 전기요금 몇 푼, 수도요금 몇 푼 가지고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에나 양보하고 밑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축복해 주십니다. 

 자기 조카 롯에게 좋은 땅 다 양보하고 돌아설 때 아브라함도 마음이 퍽 섭섭했을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네와 네 자손에 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욕심 많은 롯은 먼 훗날 소돔 고모라 성이 불탈 때 온 집과 재산과 사위까지 다 불타 죽고 말았지만 아브라함은 큰 부자가 되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삭이 우물을 판 다음에 아비멜렉의 종들이 와서 빼앗았습니다. 몇 번을 양보하고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 다음엔 빼앗지 않았습니다. 악한 자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 괴롭히지 무한정으로 괴롭히지 않습니다. 

 ③ 억지로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주라. 

 예수님 당시 로마의 법은 짐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운반 할 때 사람을 징발할 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에 5리를 짐을 지고 간다는 것은 참으로 불쾌한 일입니다. 그러나 억지로 5리만 가지 말고 10리를 가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즉, 강제로 끌려가면서 마음 상하지 말고 내 고집과 의지를 깨뜨려서 자원하여 10리를 가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수용의 자세도 넓히게 되고 포용력 있는 삶도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북한에서 남침했을 때 인민군이 시민들을 징발해서 짐을 지워 끌고 가다가 다 가서는 쏴 죽이는 일들이 있었는데 한 기독교인이 인민군의 요구하는 거리만큼 가서는 겸손한 자세로 “괜찮습니다. 더 져다 드리겠습니다.”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져다 줬더니 죽이지 않고 도리어 고기 덩어리까지 줘서 잘 먹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든 행동이 영적 생명에 의한 행동 반응입니다. 육신의 본능도 초월하고 인간의 이성의 이해판단도 초월한 영적인 행동 반응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이 불합리하계 나쁜 행동을 할 때 우리 신자들은 불합리하게 좋은 행동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도 축복을 받고 남도 살리는 영적 행동 반응의 원칙인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복음을 전하다가 아무 잘못도 없이 억울하게 돌맹이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이가 부러지며 갈빗대가 부러지면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같이 빛나며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고 잠들었습니다. 

 이러한 영적 행동 반응 때문에 자신이 위대한 순교자로 하나님 앞에 가서 큰 상을 받을 뿐 아니라 핍박자 였던 사울을 대사도 바울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부당하고 불합리한 우를 받을 때, 부당하리만큼 불합리한 행동의 반응을 보일 때 위대한 성도가 되고 더 큰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몹시 가물어서 농촌에서 물싸움을 할 때인데 한 신자가 밤을 새우며 논에 물을 대고 집에 갔다가 다음날 나와 보았더니 아래 논 주인이 둑을 터서 물을 다 빼앗아 갔더랍니다. 당장 삽을 들고 가서 때리며 싸우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다시 땀 흘리며 고생해서 물을 가두었습니다. 그랬더니 또다시 둑을 트고 물을 다 가져 갔더랍니다. 너무 화가 나서 살인이라도 할 정도로 격분했지만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했더니 그분 대답이 “억지로 참은 것으로 잘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영적 생명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그대로 해 보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기왕에 물을 빼앗긴 바에야 아래 논에 물을 채워 주고 내 논에 물을 대자하고 그 원수의 논에 물을 대주었더니 그 고약한 사람이 찾아와 머리를 숙이며“예수 믿으면 다 그렇게 됩니까? 죽을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저도 예수 믿겠습니다”하더랍니다. 

 이것이 바로 고차원의 영적 행동 반응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육신의 본능대로 반응을 나타내서도 안 되고 인간의 이성의 판단이나 계산을 앞세워 반응을 나타내서도 안 되며 영적 생명에 의한 행동 반응을 나타내야 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1990년 8월 19일 주일 낮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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