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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둥의 목자

icon01.png  김홍도 목사님의 유년기 시절부터 금란교회에 부임하시기까지의 신앙 일화입니다.
   
01. 어머님의 기도 06. 작은 욕심, 큰 욕심
02. 사과보고 놀란 어린 홍도 가슴 07. 노방전도 대장 '배선생'
03. 왼 뺨을 치면 오른 뺨도 준다 08. 천생연분
04. 만남의 역사 09. 결혼 첫날 밤은 철야 기도로
05. "어머님, 용서하세요" 10. 공동묘지 앞 금란교회로 부임
 
01. 어머님의 기도
 
"둘째 아들 홍도는 어렸을 적부터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믿음이 오히려 나를 경성하게 하곤 했다."
 
평양북도 선천에서 1908년 10월 22일 아산 이씨 집안의 3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김홍도 목사의 어머니 이숙녀 여사. 

그녀가 주일학교 반사를 맡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16살 때, 한 살 위인 김상혁씨를 만나 결혼했다. 

남편의 독립운동과 전근이 많은 공무원 생활로 잦은 이사를 해야 했고, 생활 또한 넉넉지 못해 구차한 살림을 꾸리기 위해서는 삯바느질도 해야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오직 믿음으로 어린 자녀들을 성장시켰다.

일제 시대의 갖은 탄압과 가난의 세월, 또 공산 치하의 형언키 어려운 고통들, 6.25전쟁의 와중에서 시달리던 피난생활, 어린 6남매를 데리고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나 경험한 일들 등 여자로써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도 오직 믿음으로 견디며 체험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기도의 어머니였다.

  “하나님! 자식 여섯을 굶겨 놓고 십일조를 바칩니다. 저 자식들의 장래를 책임져 주시옵소서. 우리 가정이 갈 바를 몰라 헤매고 있사오니 주님의 펴신 팔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 후 그녀는 전도사가 되어 1967년 12월 구로 중앙교회에서 심방 전도사로 사역을 하였고, 1970년에는 철원군 갈말면에 있는 군탄 교회에서 꿈에도 그리던 단독 목회를 시작했다. 그동안의 서원 기도가 60세에 이루어진 셈이다. 이 전도사는 새벽기도를 드릴 때마다 빼놓지 않고 드리는 기도가 있었다. 

“우리 아들 목사들이 한국 감리교회, 더 나아가 세계 감리교회에서 크게 쓰임 받는 하나님의 종이 되도록 해 주세요” 

두 무릎에 굳은 살이 박히도록 한 어머니의 기도에는 외상이 없었다. 슬하에 4형제가 모두 큰 교회 목사가 되었고 사위들도 목사 또는 장로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그녀의 큰 아들(선도)과 둘째 아들(홍도)은 기독교 대한 감리회 감독회장을 역임했다. 아들들이 담임하는 교회가 어머님의 기도대로 세계 감리교회 1,2위를 다투는 대형 교회로 성장한 것이다. 

이숙녀 여사는 12년간의 목회를 마치고 은퇴 후에도 100여 개가 넘는 교회에 다니시면서 신앙 간증을 했고, 2000년 9월 27일 92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 "4형제를 세계적인 목사로 키운 이숙녀 전도사의 일대기 -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中 에서 -
02. 사과보고 놀란 어린 홍도 가슴
 
"둘째 아들 홍도는 어렸을 적부터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믿음이 오히려 나를 경성하게 하곤 했다."
 
어린 홍도가 6살 때이다. 어머니께서 사과를 좋아하신 걸 기억하고 어디서 났는지 사과 몇 개를 들고 숨이 차게 집으로 달려 왔다.

"어머니 사과 잡수세요."

커다란 미소를 지으며 가져온 사과를 어머니 앞에 내놓았다. 칭찬을 기다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사과 한번 쳐다보고 어린 홍도 얼굴 한번 쳐다 보셨다.
그리고는 "이 사과 어디에서 났느냐" 며 꼬치꼬치 물으셨다.

어린 홍도의 큰 미소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점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리고는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어머니께 말씀 드렸다.
"동네 큰 아이들이 망을 보게 하고 남의 과수원에 들어 갔어요. 사과를 따서 조심씩 나눠 갖은 거예요."

어린 홍도는 나눠가진 사과를 자신도 먹고 싶었지만 어머님께서 사과를 맛있게 드시는 모습만을 상상하면서 한달음에 달려 온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바느질 하던 자 막대기로 종아리를 때리시면서 당장에 다시 가서 나무에 사과를 붙여 놓으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다시 붙여 놓지 않으면 집에 들어올 생각을 말라고 하시면서 호되게 야단을 치셨다. 겁에 질린 어린 홍도는 사과를 들고 그 과수원에 가서 사과나무에 매달아 놨다.

그 후로 그는 사과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 "4형제를 세계적인 목사로 키운 이숙녀 전도사의 일대기 -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中 에서 -
03. 왼 뺨을 치면 오른 뺨도 준다
 
"둘째 아들 홍도는 어렸을 적부터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믿음이 오히려 나를 경성하게 하곤 했다."
 
김홍도 목사의 초등학교 시절, 공산당의 압박이 날로 심해졌다.
제법 예수를 잘 믿던 또래 아이들도 공산당 압박에 못 이겨 갯벌에 썰물 빠지듯 신앙을 다 버리고 맨 나중에는 어린 홍도와 다른 아이 한 명만 남게 됐다. 학교 선생님은 그들에게 온갖 폭력과 협박을 가했지만 그들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루는 전교생이 조회시간. 어린 홍도를 단상 위에 불러 놓고 이 뺨 저 뺨을 치면서 자아비판을 시키고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고백 하라고 했다. 그러나 어린 홍도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어린 홍도는 자신의 행동이 바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 "4형제를 세계적인 목사로 키운 이숙녀 전도사의 일대기 -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中 에서 -
04. 만남의 역사
 
"둘째 아들 홍도는 어렸을 적부터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믿음이 오히려 나를 경성하게 하곤 했다."
 
김홍도 목사가 군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14살 때이다.
그는 역전과 군산 유곽시장에서 사과상자를 놓고 그 위에 실 , 바늘, 초콜릿, 과자 등을 놓고 하루 종일 장사를 했다.
삯바느질을 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어느 날 철모를 쓰고 총을 멘 군인 아저씨가 앞으로 다가 왔다.

"뭘 드릴까요?" 라며 물건을 팔 욕심으로 애걸하듯 그 군인 아저씨를 올려다봤다.

"악!" 이게 왠일일까.

전쟁 중에 헤어졌던 큰 형. 선도형이 아닌가. 얼굴을 알아보기 보다는 형의 낯익은 금니로 먼저 알아봤다.

"홍도야!"
"형!"

두 형제는 서로를 부둥켜 안고 한없이 울었다.
그날 밤 홍도는 생각했다.

"하나님이 형에게 N극을, 나에게 S극을 붙여 주셔서 우리가 다시 만난 거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 "4형제를 세계적인 목사로 키운 이숙녀 전도사의 일대기 -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中 에서 -
05. "어머님, 용서하세요"
 
"둘째 아들 홍도는 어렸을 적부터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믿음이 오히려 나를 경성하게 하곤 했다."
 
하루는 어머님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홍도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씀 하셨다.

"홍도야! 너는 상고를 나왔으니 취직을 해서 엄마를 좀 도와 다오.
내가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동생들을 데리고 집안을 꾸려 나갈 수 없구나."

홍도는 머리가 복잡했다. 주님의 뜻에 따라 신학대학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사실대로 어머니께 말씀 드렸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내 신앙의 양심으로는 돈 벌어서 나 잘 살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어요.
내 삶을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어요."

어느 누구도 그의 강한 집념을 꺾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감리교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등록금과 책값 마련을 위해 그는 교회에서 봉사를 하며 보조금을 조금 받았고 , 다시 신문 배달도 했다.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었던 대학생활이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는 굳은 일념으로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뎌냈다.

- "4형제를 세계적인 목사로 키운 이숙녀 전도사의 일대기 -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中 에서 -
06. 작은 욕심, 큰 욕심
 
"둘째 아들 홍도는 어렸을 적부터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믿음이 오히려 나를 경성하게 하곤 했다."
 
어느덧 홍도도 군대를 제대했다. 어머니는 홍도를 데리고 평소 집안과 인연이 깊은 조신일 목사님 찾아갔다.

"목사님, 우리 홍도가 담임할 만한 교회가 있나요?"
"마땅한 자리가 없어. 가서 있을 만한 교회가 없어."

세 사람 모두 안타까웠다.
그러나 아직 신학교를 다니는 학생이었던 홍도는 욕심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청평을 지나 상천이라는 곳에 빈 교회가 있다는 것을 듣고 어머니께 그곳으로 가면 어떻겠냐고 여쭈었다.

"거긴 못 가. 산골에 교인이라고는 할머니 몇 분 밖에 없고 교역자 생활비는커녕 양말 한 켤레도 마련을 못해주는 곳이란다.
거길 어떻게 가겠니?"

"어머니 제가 어찌 큰 교회를 바라겠어요? 저를 보내 주세요. 거기 가서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겠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극구 만류하셨다. 만류 하실 만 했다. 상천교회는 버스도 안 다니는 깊은 산골에 위치했다. 교회 건물은 초가집에 비가 오면 빗물이 새는 몰골로 지어졌다. 교인 수는 할머니 3명, 청년 3명이 전부였고 목회자 끼니를 이를 보리쌀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가난한 교회였다.

그러나 홍도는 이미 마음을 굳게 다짐한 상태였다. 선교를 위해 어머님의 말씀을 거슬러야 하는 것에 대해 어머님께 죄송할 따름이었다.

1963년 3월. 김홍도 전도사는 정식으로 상천 교회로 부임했다.
큰 형의 헌 양복을 새 양복으로 만들어 주신 어머니의 정성과 함께…….

- "4형제를 세계적인 목사로 키운 이숙녀 전도사의 일대기 -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中 에서 -
07. 노방전도 대장 '배선생'
 
"둘째 아들 홍도는 어렸을 적부터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믿음이 오히려 나를 경성하게 하곤 했다."
 
구룡포 장로교회의 한춘봉 목사님은 노방전도를 유독 좋아했다.
그러나 노방 전도를 위해서는 스피커를 들고 다니면서 해야 하는데 그 스피커를 들고 다닐 사람이 없어 고민했다.

이때 그 교회에서 운영하는 구룡포 유치원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배영자 교사는 이 일을 자청했다.
녹슬고 겉모양도 좋지 않고 무겁기도 했던 60년대 스피커를 상상해 보라.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27살의 처녀는 그 스피커를 머리에 이고 온 시장바닥을 누비며 노방 전도를 했다.
주위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창피함도 잊고 오직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만 뜨거웠다.

- "4형제를 세계적인 목사로 키운 이숙녀 전도사의 일대기 -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中 에서 -
08. 천생연분
 
"둘째 아들 홍도는 어렸을 적부터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믿음이 오히려 나를 경성하게 하곤 했다."
 
한편 집안에서 김홍도 전도사를 결혼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세월은 흘렀다.

주위에서 신앙 좋은 처녀가 있으니 교제 한번 해보라고 권하면 김 전도사는 "저는 교제할 줄도 모르니 처음 만나는 혼처가 하나님 주시는 혼처인 줄 알고 결혼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던 중 가평의 김경식 장로로부터 경상북도 김천에서 유치원 교사를 하고 있는 배영자라는 선생님을 소개 받았다.

김홍도 전도사가 그 유치원 선생님을 만나보기 전 그의 어머니가 먼저 만나보게 됐다.

"요즘 처녀들은 목사 사모가 힘들다고 시집 안 오려 한다던데 왜 배 선생은 교역자를 택하려 합니까?"
"그 길이 예수를 가장 잘 믿는 길 같아서요."

"우리 애는 아직 목사도 아니고 그것도 산골 개척교회에서 고생하는 전도사인데……."
"하나님의 종이야 하나님께 잘 하면 잘 살고, 못하면 못살지 않겠습니까?"

어머니는 색싯감의 대답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참 신앙이 들어가 있는 대답이었다.

"배 선생, 상천 교회에 한번 가 봅시다"
"제가 거길 어떻게 가나요. 당돌하게요."

겸손한 색싯감이 맘에 들었던 어머니. 이후 양가 부모님들과 당사자들 간에 뜻이 맞아 결혼을 약속했다.

- "4형제를 세계적인 목사로 키운 이숙녀 전도사의 일대기 -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中 에서 -
09. 결혼 첫날 밤은 철야기도로
 
"둘째 아들 홍도는 어렸을 적부터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믿음이 오히려 나를 경성하게 하곤 했다."
 
약혼식을 하게 된 김 전도사와 배영자 선생이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남들은 약혼할 때 시계나 반지를 예물로 하지만 우리는 교회에 종을 해 달면 어떨까?"

김 전도사는 아내가 될 처녀에게 물었고 그 처녀는 바로 승낙했다.

그 동안 상천 교회는 종이 없어 다 깨진 산소통을 이용해 예배시간을 알려 왔었고 그 즈음에는 그 산소통마저 누군가가 훔쳐가서 세숫대야를 두드려 예배시간을 알렸다.

결혼 기념으로 대구에서 종을 주문해 교회에 갖다 달았고 , 그 소리는 온 산골을 은은히 울려 퍼져 그렇게 은혜로울 수 없었다.

그들은 1966년 2월 3일 조신일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가야 할 터인데 이 부부는 신혼을 기도로 시작한다며 신랑은 남자부에서 신부는 여자부에서 철야기도를 했다.

신방에서는 주례목사님이 대신 잠을 청하셨다


- "4형제를 세계적인 목사로 키운 이숙녀 전도사의 일대기 -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中 에서 -
10. 공동묘지 앞 금란교회로 부임
 
"둘째 아들 홍도는 어렸을 적부터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믿음이 오히려 나를 경성하게 하곤 했다."
 
"가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려야지"

1968년 2월. 김홍도 전도사는 목사 안수를 받았고, 조신일 목사님이 시무하는 서울 광희문 교회 부목사로 근무를 하게 됐다.
그곳에서 약 3년간 사역을 하다가 조 목사님이 은퇴하게 되자 그도 그 교회를 그만둬야 했다.

막상 나오니 또 갈 교회가 없었다.

그 때 김활란 박사를 기념하여 세운 금란교회가 망우리에 있는데 그곳에는 어느 교역자도 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유인 즉 앞산은 공동묘지였고, 중랑교를 건너 논과 밭만이 있는 허허벌판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홍도 목사는 다짐했다.
'가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려야지!'

1971년 3월. 김홍도 목사는 굳게 마음먹고 망우리 금란교회로 부임했다. 그 당시 교회 건물은 24평에 교인 수는 75명이었다.

그렇게 미약하게 시작했지만 부임 한지 8개월을 지나 그 해 11월에 50평의 성전 증축을 시작으로 금란교회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는데…….

이상의 글들은 "4형제를 세계적인 목사로 키운 이숙녀 전도사의 일대기 -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 "4형제를 세계적인 목사로 키운 이숙녀 전도사의 일대기 -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中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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