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보기

불기둥의 목자

2015.04.18 11:20

19890910 죄의 합리화

조회 수 471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Extra Form
설교 일자 1989-09-10
설교 분류 기타
설교 본문 사무엘상 15장 1, 9~15, 22~23절
extra_vars6 ./pds/board/33/files/doc/890910-26.죄의 합리화.hwp

26.죄의 합리화

사무엘상 15장 1, 9~15, 22~23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3)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범죄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죄를 범하면서도 그것이 옳고 당연한 것처럼 변명하고 합리화시키는 것이며 이는 한층 더 악한 죄입니다. 죄를 합리화 내지 정당화하려는 것은 한 단계 더 고차원적인 무서운 죄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쳐서 도말하여 남녀노소 짐승까지도 다 진멸해 없애버리고 하나도 남겨두는 것이 없게 하라고 사울 왕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먼저 우리는 여기서 마귀에게 속한 것,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모든 죄악 된 요소들은 인정사정 보지 말고 다 끊어버리고 없애버려야 된다는 것을 알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도 살려두거나 남겨두지 말라는 엄한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은 꽤나 인정이 많은 사람인 양 아말렉 왕 아각이 애걸복걸하며 살려 달라고 하니까 죽이지 않고 살려서 데려왔고, 짐승들도 새끼 한 마리 남겨두지 말고 진멸해 버리라고 했는데 9절에 보면“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시시한 짐승, 값어치 안 나가는 것들만 없애 버리고 기름지고 살진 소와 양은 다 탐이나서 살려서 끌고 왔습니다. 이렇게 불순종하는 사울 왕을 보고 사무엘은 근심하면서 온 밤을 새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시고 버리시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찾아가니까 뻔뻔스럽게도“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하고 거짓말을 했습니다.이때 마침 많은 소와 양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가리키며“그럼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소의 소리는 어찜이니이까”(14절)하고 지적하니까 그것은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다 진멸하였나이다”라고 죄를 합리화시켰습니다. 자기가 탐이 나서 끌어와 놓고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가져왔다고 핑계 댔습니다. 그 뿐입니까? 자기는 쏙 빠지고“백성”이 끌어왔다고 했고 또 자기의 하나님은 아닌 것처럼“당신의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끌어왔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가증스럽고 어리석은 말입니까? 그 때의 사무엘이 유명한 말씀을 했습니다.“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사울 왕은 진실한 마음과 충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마음이 없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완고한 마음을 굽히지 않고 불순종했기 때문에“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졌을 뿐 아니라 가증하게도 자기의 죄를 합리화시켰습니다. 즉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끌어왔다고 말입니다. 제 욕심 채우고 제 고집대로 해놓고는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처럼 가장했습니다. 그럴듯한 말에 사람은 속아 넘어갈지 몰라도 불꽃같으신 눈으로 중심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께 그런 변명과 합리화가 통합니까? 하나님 앞에는 항상 중심이 밝아야 하고 솔직하고 진실해야만 합니다.

 어떤 면에서 다윗 왕은 사울 왕보다 더 큰 죄를 범했습니다. 부하장수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마침 임신했다고 하니까 그 장수를 궁궐로 불러다가 집에 들어가 편히 쉬라고 할 때“여호와의 법궤가 들판에 있고 내 부하들이 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내 어찌 편하게 집에 들어 잠을 자겠습니까?”하고 끝내 들어가 자지 않으니까 자기 계획이 어긋나므로 그 충성스러운 부하 장군을 맨 일선에 나가 싸우다 죽게 했습니다. 간음죄, 살인죄, 권력 남용죄의 몇 가지 무서운 죄를 범하였으나 후에 사무엘에 비하면 무명의 선지자에 지나지 않는 나단 선지자가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호통을 칠 때, 그는 변명하지도 않고 나단 선지자를 책망하지도 않고 푹 고꾸라지면서 “내가 범죄했나이다”하고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얼마나 울며 회개했던지 베개와 침상이 눈물에 젖을 정도로 울었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고 진실하게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회개한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왕으로 훌륭한 왕으로 와석종신했으나 하나님을 속이고 자기 양심을 속이면서 죄를 변명하고 합리화시키려고만 했기 때문에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받아 이상한 발작 증세를 일으키기도 하고 적군에게 쫓기다가 다급하니까 자기 칼에 자기가 엎드려 자살하고 자기의 아들까지 전사케 하고 말았습니다. 중심이 하나님께 바르지 못하고 자기의 죄를 합리화시키려 드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가증한 죄인가 다시한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죄의 합리화는 모두 진실치 못하고 거짓되고 위선적인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1. 죄를 합리화하지 말라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대신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것은 한 단계 더 높은 죄요, 죄 위에 하나님을 속여 보려는 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합리화가 통합니까? 마치 사울 왕이 끌어온 소와 양이 음매 !음매 !소리친 것처럼 양심의 소리, 영의 음성이 소리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욕심과 탐심 때문에 부모 봉양을 안 하고 불효해 놓고“고르반”이라고 했다. 즉“부모님께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려서 효도 못했다”고 합리화시키는 것을 보고(막 7:11~14) 몹시 책망하셨습니다. 죄에 대한 변명이나 합리화가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습니다. 맑은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람 눈에도 뻔히 속이 들여다보이는데 하나님께 그런 거짓을 행하겠습니까?

 아담과 하와 때부터 그런 버릇이 있었습니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는 하나님이 문책하시니까“하나님이 주셔서 함께 있는 저 여자가 내게 줘서 따먹었습니다”했고 또 하와에게 문책하니까“저 뱀이 나를 꾀므로 먹었나이다”하고 변명하고 합리화하려고 했습니다. 바로 사단 마귀가 속임수와 합리화에 능한 놈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거짓영에 미혹되어 범 죄 했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변명하고 합리화했습니다.

 일정 시대에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우상 앞에 절하지 않고 순교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제2계명을 범하면서 무서운 죄를 범했는데 더욱 나쁜 것은 어떤 이는 십자가를 손에 들고 가서 신사참배는 하되 자기는 십자가에다 절했다고 합리화하면서 자기는 마치 우상숭배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가소로운 일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신앙의 절개를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손에 십자가를 들고 그 앞에 절했다고 하나님이 좋게 보시겠습니까? 또 하늘이나, 땅에나, 땅속에나 물속에나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어 거기서 절하지 말라고 했으면 십자가에다 절을 했어도, 예수님 형상에다 절을 했어도 우상숭배입니다. 변명이나 합리화가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께 죄가 없는 것을 알고도 군중의 소리가 무서워서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주고는 양심이 괴로워서 물에다 손을 씻고“나는 잘못이 없다. 피 값을 너희가 당하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그에게 죄가 없었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2000년을 내려오면서 사도신경을 외우는 사람마다“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라고 고백합니다.

 죄의 합리화는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고 내 양심이 허락지 않는 일은 내 마음속에도 받아들이지 말아야 되고 만일 범죄하고 잘못했다면 솔직하게 털어놓고 회개해야지 합리화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솔직하고 진실하게 고백하고 회개할 뿐 아니라 남편이나 아내 자식한테도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 훌륭한 사람입니다 절대로 잘못해 놓고도 사울 왕처럼 고집이나 부리고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사람은 한마디로 하나님께도 소망이 없고 사람들한테는 상대 못할 인간입니다. 비열하고 거짓되고 위선적인 사람입니다. 대화해 보다가 진실성과 솔직성이 없는 사람인 것을 발견하면 일단 접어 두고 조심해야지 믿고 상대해선 안 됩니다. 시편 139편 23~24절의 다윗의 진실한 기도가 곧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2. 맑은 양심을 가지라


 죄를 합리화하는 가증스러운 죄인이 되지 않으려면 항상 맑은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중심에 진실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위선자가 되었거나 거짓된 마음을 품었다면 가슴을 치며 통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맑은 양심을 통하여 들려오고 거짓된 마음과 마비된 양심에는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음성만 들려올 뿐입니다. 유리창에 흙탕물이 묻으면 밝은 햇빛이 비쳐 들어올 수 없듯이 맑은 양심, 솔직한 마음의 소유자에게만 진리의 계시와 하나님의 빛이 흘러들어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하신 말씀은 악한 세대에 지혜롭게 처신하되 중심에 진실성과 순결성을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울도“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고 했는데 양심을 버린 사람은 그 믿음도 파선한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맑은 양심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롬 9:2)라고 했습니다. 또 찬송가 332장 3절에 “정결한 맘 그 속에서 신령한 빛 비치오니 이러한 맘 나 얻으면 눈까지도 밝으리라 물가지고 혹 씻든지 불가지고 태우든지 내 안과 밖 다 닦으사 내 모든 죄 멸하소서”하는 찬송처럼 중심에서 나온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신령한 사도 바울은“…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행 23:1)고 고백했습니다.“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행 24:16)고 했습니다.

 맑은 양심 진실한 마음을 갖지 못할 때 거짓의 아비인 사단마귀에게 잘 속아 넘어가고 유혹에도 잘 넘어갑니다. 진실한마음을 갖지 못할 때 이단에게도 잘 넘어갑니다. 공산주의 사상은 거짓된 마귀의 사상입니다. 마귀의 설득력도 강하기 때문에 거듭나지 못한 심령, 진실치 못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공산주의 이론에 잘 속아 넘어갑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똑똑해도 아담 이후 타락한 인간의 이성으로는 거짓과 참을 구별 못합니다. 어제 신문에도 보니까 대학생들이 김일성의“피바다”를 공연하는 등 거짓된 사상에 물든 것을 볼 때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고 답답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김현희가 KAL기 폭파범인 것을 본인이 버티다 못해 고백했고 전 세계가 인정하고 아는 바인데 임수경은 그것을 안 믿고 “북한에서 온 증거를 대라”고 다그쳤다니 참으로 딱한 일 아닙니까?

 또 많은 대학생들이 남침을 북침이라고 믿고 있으니 한심하지 않습니까? 며칠 전에 6·25때 북괴군의 부 참모총장으로 지냈던 당시 이상조 중장이 후르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때 주 소련대사로 있다가 김일성이 소환하자 불응하고 그대로 남아서 망명했다가 온 사람의 말이 명답입니다. “전쟁이 발발한지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는 것을 보면 알지.”그런 실력 가지고 어떻게 전쟁을 일으키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말에 속아 넘어가니 한심한 일 아닙니까? 북한 공산당의 말대로 “미제국주의자 물러가라”하는데 미군이 들어오고 싶어 들어왔습니까? 미군이 다 돌아갔는데 6·25 전쟁을 일으켜 남쪽 끝까지 밀고 내려오니까 하는 수 없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에 의하여 들어온 것 아닙니까? “남북한 불가침조약”을 맺자고 아우성인데 그렇게 되면 미군 물러가라고 할 것이고 물러간 다음에 다시 남침하려는 계획 아닙니까? 남북한군사력이 균형 잡힌 다음에야 무엇 하러 붙들어 두며 그들인들 왜 남의 나라에 있겠습니까? 모두 붉은 용의 사상에 물들어서 그렇습니다. 거듭난 신앙과 맑은 양심으로 생각해 보면 판명이 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거짓 영에 속아서 그런 것입니다.

 소위 목사, 신부들까지도 공산화 통일이라도 좋으니 무조건 통일하고 보자고 하니 말이 됩니까? 북한은 천여 명의 목사와 수많은 신자들을 처참하게 죽이고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 선천을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할 정도로 그 많던 교회들을 다 파괴하고 폐허를 만들었는데 그런데도 “공산화 통일이라도 통일만 되면 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닙니까? 그런 살인 만행의 원흉을 보고 “존경하는 주석님”이라고 하니 목사, 박사라도 거듭나지 못한 심령은 거짓 영과 거짓 사상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가 악하고 어지러울수록 맑은 양심과 진실한 마음을 잃지 않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1989년 9월 10일 주일 낮 대예배 설교>




  1. 19891008 성공적인 가치관

    설교 일자1989-10-08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2. 19890917 기도생활의 절실한 요구

    설교 일자1989-09-17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3. 19890910 죄의 합리화

    설교 일자1989-09-10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4. 19890827 신자의 영적 권위(4)

    설교 일자1989-08-27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5. 19890820 신자의 영적 권위(3)

    설교 일자1989-08-20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6. 19890813 신자의 영적 권위(2)

    설교 일자1989-08-13 설교 분류천국과지옥
    Read More
  7. 19890806 신자의 영적 권위(1)

    설교 일자1989-08-06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8. 19890730 영적인 지혜

    설교 일자1989-07-30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9. 19890702 잃은 양을 찾는 심정

    설교 일자1989-07-02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10. 19890625 붉은 용과 공산주의

    설교 일자1989-06-25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11. 19890618 성공적인 삶의 자세

    설교 일자1989-06-18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12. 19890611 나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다

    설교 일자1989-06-11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 28 Next
/ 28

전체 메뉴 보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