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보기

불기둥의 목자

조회 수 39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extra_vars1 <1978년 3월 5일 주일 낮 대예배 설교>
extra_vars2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11. 신앙생활과 양심
디모데전서 1장 12~20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사람은 몸과 혼과 영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영 자체는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그 기능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능(communion), 둘째로 직관의 기능(intuition), 셋째로 양심의 기능(conscience)입니다.
 영은 양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양심의 소리를 통해서 영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영을 좇아 신앙생활을 바로 하려는 사람은 양심의 소리에 민감해야 하고 양심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양심이 마비된 사람은 제 아무리 큰 은사를 받았다고 해도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계시를 결코 바로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양심의 기능 
 믿음과 양심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믿음이 없이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없고 선한 양심이 없이 좋은 믿음을 절대로 가질 수 없습니다. 좋은 믿음을 가지는 비결 중의 하나는 선한 양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벧전 3:21)이라고 했습니다. 양심은‘마음에 새긴 율법’(롬 2:15)이라고 했고, ‘마음의 눈’(마 6:22)이라고 했는데 이 마음의 눈이란 양심의 눈입니다. 그래서 눈이 어두우면 온몸이 어둡고, 눈이 밝으면 온몸이 밝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양심이 맑지 못한 것은 마음의 눈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① 양심은 도덕 생활의 나침반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두 가지 큰 선물이 있는데 하나는 이성이요, 또 하나는 양심입니다. 그런데 양심은 배의 나침반과 같아서 도덕 생활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음행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데리고 와서 돌로 쳐 죽이려고 할 때,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서 있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했습니다.사람은 양심이 시키는 대로 도덕적 생활을 하면 마음이 기쁘지만 양심을 거스리면 아무리 외부 환경이 좋아도 괴롭고 불안합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할 때에 매를 맞고 핍박을 받아도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평안했고 기뻐했지만 가룟 유다는 양심을 거스리고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먹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집 짓고 잘 산 것이 아니라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러워 결국 돈을 성전 뜰에 던져 버리고 목매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법정은 혹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양심의 법정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양심이 도덕 생활의 나침반인 것을 알고 양심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고 양심이 거절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님께 찾아와서 간증을 했습니다. 몇 년 전에 처남하고 물건을 사고 추첨권을 받았는데 처남이 추첨권을 자기에게 맡겨 주더랍니다. 그런데 나중에 우연히 추첨 결과를 보니까 가지고 있던 추첨권에 재봉틀이 걸렸는데 자기 것이 아니라 처남의 추첨권이 당첨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 소리안하고 재봉틀을 타다가 여러 해 동안 썼습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그 재봉틀을 볼 때마다 마음이 늘 괴로웠는데 하나님 말씀을 듣는 순간에 그 죄가 회개되면서 여러 해가 지났지만 그제서라도 그 재봉틀을 처남에게 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이렇게 올바른 도덕 생활의 방향을 가르쳐 줍니다.
 양심을 거스를 때, 양심은 책망을 받고 두근거리고 괴롭고 불안 합니다 그러나 양심을 따라 바른 길을 갈 때에는 마음이 평안하고 기쁨이 오는 법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줄 때 자기는 무죄하다고 손을 물에 씻었으나 양심은 괴로웠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암몬 사람에게 죽게 내어줄 때 양심은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욕의 소리, 욕심의 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에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한 것입니다. 정욕의 소리가 더 크면 양심의 소리를 못 듣습니다. 욕심의 소리가 더 크면 양심의 소리를 못 듣습니다. 마치 전화를 받을 때 라디오 소리나 전축 소리가 크면 그 말이 들리지 않듯이, 정욕과 욕심의 소리가 너무 강하게 드러나면 양심의 소리를 못 듣게 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욕심의 소리가 너무 커서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다윗 왕은 정욕의 소리가 너무 커서 양심의 소리를 못 듣고 비도덕적 행위를 감행했습니다.
 양심은 도덕 생활의 나침반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따라 살때에 진정한 도덕적인 생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② 양심은 영음을 듣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영의 기능은 양심과 합작해야 그 기능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양심이 마비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성령을 좇아 생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받을 때 양심의 영음을 들었기 때문에“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이 큰 악을 행하리까”하고 그 죄악을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일로 도리어 요셉은 감옥에 들어갔으나 마음은 늘 평안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들으려면 양심이 면도날처럼 예리해야 합니다. 성화(聖化)의 제일보는 양심의 소리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에 따르는 자가 참으로 신령한 자입니다. 아무리 신령한 기도를 잘 하고 은사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양심이 마비된 사람은 진정 신령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여자가 부흥회 때 회개를 하는데, 새벽기도를 5년 동안이나 나오면서 고무신은 한 켤레밖에 안 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이 닳아질만 하면 새 신과 바꿔 신고, 또 닳아질 만하면 다른 신과 바꿔 신었는데 그러면서도 새벽기도는 5년 동안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신령한 생활이겠습니까? 양심이 마비되면 신령한 생활에 기초가 없는 것이며 언젠가는 무너지고 맙니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그 믿음도 헛것이고 그 인격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지식과 재주가 많고, 인물이 잘났다 하더라도 양심이 무너진 사람은 어디에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양심이 정죄하면 하나님도 정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양심보다 더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고 했습니다.
 양심을 버린 사람은 배가 파선해서 침몰하듯이 그의 신앙도 인격도 파산하고 마는 것입니다. 양심의 창문을 통하여 하늘의 광채가 그 영혼 속에 들어가 그의 모든 존재를 빛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③ 양심과 영교
 예수 믿기 전보다 예수 믿고 나서 괴로움이 더 많은 것은 예수 믿고 죄 사함 받을 때 죽었던 양심이 살아나서 죄를 책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죽은 사람은 양심도 죽어 있으므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 받은 확신을 가져야 하나님과 영교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4)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죽었던 양심이 살고 직관이 소생합니다. 직관이란 이성의 작용이 아니라 영적으로 직접 아는 것입니다. 양심과 직관은 분리시킬 수가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과 송사를 받으면 하나님과 교제가 막히게 되고 직관이 하나님과 접근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이 책망하는 일은 즉시 중단해야 하고, 죄를 저질렀으면 즉시 회개하고 자복하여 예수의 피로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양심이 괴로운데도 그것을 그대로 밀고 나가면 그 사람은 완전히 타락하고 맙니다. 모든 죄는 그리스도의 피로 해결받고 언제나 양심에 송사받을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머리 숙일 때마다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있다면 즉시 자복하고 예수의 피로 씻음 받아야지 그대로 두면 백번 예배드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선한 양심 속에서만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제가 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것은 자신이 모르는 죄가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양심에 알려진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처 알지 못한 죄는 예수님의 피로 다 덮어 주십니다. 그러다 믿음이 자라게 되면 몰랐던 죄도 다 깨닫게 해주시는데 그때 자복하면 되는 것입니다. 모르는 죄, 양심에 깨닫지 못한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받지 않습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바늘로 찔러도 따가운 줄 모릅니다. 피가 나도 아픈 줄 모릅니다. 양심의 문둥병이 걸린 사람은 양심이 찔러도 아픈 줄 모릅니다. 강퍅한 양심, 위조된 양심, 마비된 양심이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하고 언제나 솔직하게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구하고 마음을 다하여 순종하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2. 양심과 논쟁하지 말라 
 양심은 영적 직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지 아니하는 것은 모두 정죄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성이나 지식으로 아무리 합리화시켜도 양심은 잠잠하지 않습니다. 틀린 것은 틀렸다, 옳은 것은 옳다 하지 아무리 이성적으로 논쟁을 해가며 양심을 달래 보아도 양심은 논쟁하지 않는 것입니다. 양심은 곧이곧대로 나가지 절대 논쟁을 하지 않습니다. 설복하거나 정당화하거나 합리화가 불가능합니다.
 무엇을 훔치고 양심이 괴로운 것을 달래기 위해 그걸 가지고 구제 사업에 썼다 하더라도 그 훔친 양심의 괴로움은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설명은 이성을 만족시킬 수는 있어도 양심은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지적이고 선한 일같이 보여도 양심이 동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비논리적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착하고 훌륭하다고 칭찬해도 양심이 소리치면 괴로운 법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미워하고 알아주지 않고 핍박하고 오해를 해도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을 때는 평안하고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할머니가 어느 날 새벽기도에 나와서 은행에서 돈을 훔쳤다고 울며불며 회개를 하더랍니다. 내용인즉 은행에서 돈 만원을 찾는데 내어주는 돈을 세어 보니까 100원짜리가 100장이 되어야 하는데 101장이더라는 것입니다. 101장이면 다시 세어 보던가 해서 정말 1장이 더 왔으면 되돌려주어야 하는 것을 가슴을 두근두근하면서 그대로 받아들고 왔답니다. 양심이 괴로웠지만, 그냥 그 돈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집에 와서 세어 보니까 남긴 뭐가 남습니까? 할머니가 착각한 것이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남의 것을 훔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도둑질한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뿌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며 회개하더라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아말렉과 싸울 때 하나님께서‘소나 양이나 사람을 다 진멸하라’고 하셨는데, 살지고 탐스러운 짐승과 왕 아각을 살려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변명하며 합리화하기를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때 말씀이“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어기면서 어떻든 합리화시키려 하고 논쟁을 벌이려 하고 있습니다. 양심과는 논쟁해도 안 되고 합리화시켜도 안 됩니다.사울은 기름진 제물과 번제의 숫자로 양심의 영음을 잠잠케 해보려고 했으나 헛수고였습니다. 양심의 소리는 피하거나 변명하지 말고 그대로 귀를 기울여 듣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할수록 더욱 예민해집니다.
 바울은“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행 23:1)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원하노라”(행 24:16)고 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 신령한 생활은 양심을 통하여 들려오는 음성을 들을 줄 알고 그 예리한 양심에 그대로 따를 줄 알아야 됩니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불기둥40호 특별간증문-2 미디어사역부 2013.03.22
공지 불기둥 40호 특별간증문-1 1 미디어사역부 2013.03.22
248 04권 - 32. 심야의 감사 찬송 미디어사역부 2013.09.25
247 04권 - 33. 상한 갈대를 꺾지 말라 미디어사역부 2013.09.25
246 04권 - 34. 체면을 버리자 미디어사역부 2013.09.25
245 04권 - 35. 인생과 습관 미디어사역부 2013.09.25
244 04권 - 36. 청년과 결심 미디어사역부 2013.09.26
243 04권 - 37. 초월적인 삶 미디어사역부 2013.09.26
242 04권 - 38. 성탄과 선물 미디어사역부 2013.09.27
241 05권 - 01. 말구유의 예수님 미디어사역부 2013.09.27
240 05권 - 02. 말씀으로 복받는 해 미디어사역부 2013.09.28
239 05권 - 03. 다섯 가지 구원 미디어사역부 2013.10.01
238 05권 - 04. 복된 영상을 그리자 미디어사역부 2013.10.01
237 05권 - 05. 믿음과 그리스도의 분량 미디어사역부 2013.10.01
236 05권 - 06. 승리하는 교회 미디어사역부 2013.10.01
235 05권 - 07. 짧은 인생과 영원한 소망 미디어사역부 2013.10.01
234 05권 - 08. 마음의 평안을 지키라 미디어사역부 2013.10.02
233 05권 - 09. 성도의 면류관 미디어사역부 2013.10.02
232 05권 - 10. 하나님을 향한 자세 미디어사역부 2013.10.04
» 05권 - 11. 신앙생활과 양심 미디어사역부 2013.10.04
230 05권 - 12. 바울의 가시12. 바울의 가시 미디어사역부 2013.10.04
229 05권 - 13.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자유 미디어사역부 2013.10.05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20 Next
/ 20

전체 메뉴 보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