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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둥의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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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_vars1 <1975년 2월 9일 주일 낮 대예배 설교>
extra_vars2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8~19)

20. 성전 숙청의 원인
요한복음 2장 13~22절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8~19)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비하신 분이시며 원수들에게 붙들려 매를 맞으시면서도 대꾸하지 아니하시고 반항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시지만 반대로 불의와 죄악을 볼 때에는 몹시 분노하고 책망하신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죄를 짓고 회개하고 자복하고 겸비한 사람에게는 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간음을 하다 현장 에서 붙잡혀 온 여인을 보고 그가 애통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에“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도 되어 주셨던 예수님 이었습니다. 그러나 외식하며 겉으로만 선한 체 하고 하나님을 잘 믿는 체 하고 위선이 가득하고 죄악이 가득 찬 사람을 볼 때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하고 책망 하셨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올라오실 때에 먼저 성전에 들어가셨던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그렇게도 온유하고 겸비하신 분이지만 성전에 들어가 보시고는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고 상을 엎어 버리고 다 내쫓아 버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분노하신 모습인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이 예루살렘 성전을 숙청하시고 뒤엎어 버렸는지 그 원인을 찾아보아서 우리들도 숙청의 대상이 되지 않았는지 알아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대상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 성전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섬기는 교회, 또 하나는 우리의 몸, 심령도 역시 성전인 것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 6:19)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숙청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교회도 하나님의 숙청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그러면 어찌하여 이렇게 숙청 되었는가 알아보겠습니다.

 

1. 안일주의 때문입니다 
 본래 제물은 각자가 마련해 가지고 오며 아무리 수십 리, 수 백리 밖에서라도 정성껏 몰고 와서 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차츰차츰 세월이 흘러가면서 번거롭고 귀찮은 일을 피 하고 안일하게 제사 드리기 위하여 제물 대신 돈을 가지고 와서 제물을 사서 제사를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안일주의가 결국은 성전을 더럽히고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의 신앙도 안일주의에 빠지면 타락하게 되고 그 사람의 심령에 짐승과 같은 마귀가 들끓어 예수님이 분노하시는 숙청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현대인들은 예배를 잘 안 드리려 합니다. 주일 낮에만 한 번 와서는 ‘하나님 안녕하십니까 저 왔다 갑니다’이렇게 인사만 드리는 나팔꽃 신자(morning glory christian)가 있는가 하면 전혀 교회에 나오지도 않는 신자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靈) 이신데 교회에 나올 필요가 있느냐’하면서 TV나 라디오로 예배를 드리면 그만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강도의 굴혈(堀穴)이 되어가는 징조인 줄로 믿습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면에서는 어렵게 믿어야 되고 힘들게 믿어야 됩니다. 구원은 십자가에 보혈을 믿음으로 얻지만 안일하고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천국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당해야 할 것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려움도 있고 모험도 있고 환난과 핍박도 받아야 됩니다.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와…”(암 6:1)라고 하였듯이 안일한 자를 하나님은 괘씸하게 보신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다윗 왕도 고생하고 분주할 때에는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통일하고 호화로운 궁중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때에 거룩한 임금 다윗도 범죄하고 무서운 화를 가져오게 되었던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물론 그 후에 침상이 젖도록 눈물로 회개했기 때문에 용서를 받기는 했으나 안일한 마음은 무서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일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편안하고 게으르고 안일한 가운데 마귀는 틈탑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안일한 마음을 갖지 아니하고 항상 주님의 성전에 찾아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성전 숙청을 하게 된 동기는 타산주의 때문입니다 
 성전 안에서 돈을 바꾸는 물건을 사고파는 타산주의와 배금주의 때문에 성전을 숙청했던 것입니다. 제사장과 장로들이 제물을 성물이라고 해서 시장보다 몇 배나 비싸게 팔았다고 합니다. 종교가들은 어떻게 바른 제사를 드릴까는 생각하지 않고 이해타산만 하고 돈 벌 생각만 했습니다. 따라서 성전은 예배 하거나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시장판이 되고 강도의 굴혈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과 기도의 능력과 말씀의 능력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것이지, 물질주의가 되면 타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물질이 없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보다 믿음이 앞서야 합니다. 배가 물이 없이는 못가지만 물이 배 위로 올라오면 그 배는 가라앉습니다. 이와 같이 순서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개인의 신앙생활도 이해타산을 너무 따지면 바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귀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을 때 가룟 유다는 말하기를 “아니 저 여자가 아까운 물질을 허비하는구나 그것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면 될 텐데 어찌하여 허비하느뇨”라고 계산부터 따졌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책망하셨던 사실을 볼 수 있듯이 타산주의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은 이 축복도 타산적이었다면 안 일어났을 것입니다. 빌립처럼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와도 조금씩 돌아가고 말 텐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 먹입니까”하는 계산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계산과 타산으로 운영된다면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도 타산만 가지고 한다면 이 예배당을 10년이 지나도 못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모험으로 지었습니다. 할렐루야! 신앙생활은 모험이지 타산이 아닙니다. 믿음이 먼저이지 물질이 먼저가 아닙니다. 타산주의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타산만 따져서는 평생 십일조 한 번,감사 헌금 한 번도 못합니다. 여러분! 빚을 져도 할 것은 해야 됩니다.그렇게 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기적도 은혜도 축복도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험적으로 살 때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타산을 따지면 타락하게 됩니다. 부디 모험과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경제가 무너져도 숙청을 받았습니다 
 성전 안에는 산 짐승이 못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죽어서 들어와 제물로 드려져야 할양과 소와 염소가 산 채로 성전의 현관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마당에서 현관으로, 현관에서 성전으로 들어와서 짐승을 사게 되었습니다. 마당에 있어야 될 것은 마당에 있어야 하고, 현관에 있어야 할 것은 현관에 있어야지 경계 없이 성전 안까지 들어왔기에 그 성전은 강도의 굴혈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경계, 범하지 말아야 될 것은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한 것은 거룩하게 보존하고 지켜야 합니다. 아니,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내 생명이 죽는 것같이 여기고 지켜야만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게 보시고 보장하여 주시며 기뻐하시는 성도와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도 거룩하게 지킬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경계하고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합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 가 얻지 못한 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 하였느니라…”(겔 22:30~31)고 했습니다. 불로 멸하여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곽이 무너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거룩한 것은 지켜야 할 텐데 무너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서 무슨 하나님의 보장을 받고 복을 받겠다고 하겠습니까?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무너진 성곽을 회개함으로 다시 쌓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으로 쌓으십시오. 눈물로 다시 제단을 쌓으십시오. 지켜야 할 성곽은 지키고 경계를 분명히 해야지 그렇지 못하면 적이 쳐들어옵니다. 마귀가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짐승 같은 마귀가 들어와서 우리의 심령을 다 뒤집어 놓고 강도의 굴혈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벨사살 왕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써야 할 구별된 그릇을 갖다가 술을 부어 마시고 연회하는 그릇으로 사용했다가 죽음을 당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삼손은 특별히 구별된 사람으로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기생 드릴라의 무릎에서 머리를 깎이고 눈이 뽑히고 맷돌질을 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이 불쌍히 보시고 원수를 갚게 하시긴 했지만 정욕에 끌려 자기 신세를 망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자가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경계가 무너지면 안됩니다. 성별(聖別)하여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과 내 것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내 것 중에서도 서원한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한 번 무너졌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다시 말씀으로 쌓고 통회하고 기도하며 눈물로 제단을 다시 쌓고 무너진 성곽을 다시 쌓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언제나 경계가 분명해야 합니다. 남 녀 간의 경계도 분명해야 되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나 육신의 욕정적 으로 좋다고 너무 가까워지고 지켜야 될 경계를 지키지 아니하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회에서 종이 한 장 같은 조그만 경계를 조심하지 못하다가 무서운 결과를 빚고 만 경우를 우리는 너무 많이 보아왔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새 예루살렘 성에는 사방으로 성 곽이 둘러싸여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곽이 없는 예루살렘이 있을 수가 없듯이 천국에 들어 갈 사람도 그의 심령에 경계가 분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경계를 뚜렷이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어떤 사람이 낙타를 몰고 사막을 가다가 밤에 추워서 천막에 들어가 있는데 낙타가 사정을 합니다. “주인님, 지금 너무 추운데 코만 조금 들이밉시다.“주인은 승낙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주인님, 머리까지만 들어갑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후에는 두 다리가 들어오고 온몸이 다 들어오게 되었을 때 주인은 “나가라!”고 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이리하여 자리가 바뀌었다는 우화가 있습니다. 마귀란 놈은 미련하게 처음부터 무서운 죄를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조그만 것부터 쐐기를 틀고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끊을 것을 끊어 버리고 경계를 분명히 하시길 바랍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천사도 될 수 있고 마귀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일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강도의 굴혈이 되어서 숙청을 받고 내어쫓김을 당한 것은 바로 경계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으로나 몸으로나 물질로나 그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것과 내 것,성별된 것을 분명하게 구별할 줄 아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도 주님께서 내 속에 찾아오셔서 보실 때에 안일주의나 타산주의에 빠져 있지나 않은가 반성해 보시고, 경계가 무너지지 않았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시고 언제 주님 앞에 서더라도 숙청의 대상이 되지 아니하고 칭찬과 복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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