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보기

불기둥의 목자

조회 수 30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Extra Form
설교 일자 1991-08-25
설교 분류 기타
설교 본문 시편 51편 12절
extra_vars6 ./pds/board/33/files/doc/910825-31. 자원하는 심령과 믿음.hwp

31. 자원하는 심령과 믿음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2)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으로 한 달 가까운 해외여행을 은혜 중에 잘 마치고 건강한 몸으로 금요일에 돌아왔습니다. 여행사에서 따라 다니며 안내했던 한동훈이라는 젊은이가 자기는 60회의 여행 에스코트를 해보았지만 이렇게 날씨도 좋고 사고도 없고 은혜스러운 여행안내는 처음 해보았다고 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며 또 사랑과 기도로 밀어주신 여러분께 참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이번 여행 중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 2일 머물다가 공산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로 들어갔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많이 자유화된 나라이지만 자유진영인 오스트리아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두 나라는 서로 인접해있어서 땅도 같고 사람도 같아 보였지만 너무나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오스트리아는 GNP가 1만 6천불이었지만, 체코슬로바키아는 800불로 20분의 1밖에 안 되었습니다.비엔나는 평화와 자유가 넘쳐보였고 밤에는 시청 앞에 모여서 시민들이 오케스트라의 음악에 맞추어서 춤을 추며 즐기는 반면에, 적성 국가인 프라하는 음산하고 억눌리고 부자유해 보였습니다. 한 예로 비엔나에서 프라하로 관광버스를 타고 가는 중에 차가 밀려서 한 30분 기다렸다가 차례가 되어서 보니 경찰관들이 차를 세워놓고 속도위반을 안 했는데도 위반했다고 떼를 써서 돈 얼마씩을 받고서야 보내주는 것이었습니다. 


1. 공산주의와 자유 


 한마디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자유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기계적이고 형식적이고 일을 해도 성의가 없이 기계가 돌아가 듯 형식적으로 움직일 뿐입니다. 한번은 비가 오는 날인데 물 뿌리는 차가 길에 물을 뿌리더랍니다.“비가 오는데 무엇하러 물을 뿌리느냐?”고 물었더니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이니까 비가 오든 안 오든 물을 뿌린다”고 하더랍니다. 무신론 사상인 공산주의는 하나님의 뜻과 너무나 배치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경배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자유, 하나님 명령에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는 엄청난 자유를 주셨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케하고 또 구원하시느라고 독생자를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하느냐고 의심을 갖기도 합니다. 선악과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사이의 구분점이며 한 국가의 법이 있듯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안 따먹을 수도 있는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조작하는 대로 움직이는 기계나 로보트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해야 되지만 불순종할 자유도 주신 것입니다. 다른 동물이나 식물은 하나님을 거역할 수도 없고 죄 지을 자유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만 이 엄청난 자유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가 전도하느라고 힘들게 고생하지 않도록 하늘에 수천 개의 스피커 소리와 같은 큰 소리로“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그렇지 않으면 벼락을 쳐서 다 멸하겠다”고 한마디 하시면 쉬울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게 폭력과 위협의 방법을 쓴다고 회개하지도 않지만 그보다 하나님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회개하고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진실한 회개도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참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억지로 사람을 미치게 하고 죄짓게 하고 고통을 주지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감화 감동을 주어서 스스로 회개하고 스스로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마귀의 사상이기 때문에 무신론을 주장하고 폭력주의를 내세웁니다. 즉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기 때문에”거짓말을 하든, 사람을 죽이든, 불을 지르든 상관없다는 것입 니다. 그러므로 엄청난 독재와 대학살을 감행하고, 인류사회에 엄청난 비극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엊그제도 폭력 쿠데타로 다시 소련을 뒤엎으려고 했지만, 자유와 진리를 맛본 국민이 이를 용납하지 않아서 결국은 실패했던 것입니다. 70년 동안 속았기 때문에 더 이상 속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북한 땅에도 진리와 자유의 바람이 불어 들어가면 맥없이 무너지는 때가 올 것입니다. 

 또한 공산주의는 평등을 주장하고 다 똑같이 재산을 가지고 똑같이 살아야 된다고 주장하다 보니까 모든 것이 기계적이고 획일적입니다. 부자도 없고 가난한 자도 없어야 된다고 하다보니까 부자나 잘 사는 사람은 없어지고 다 같이 못 사는 나라가 되고만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부자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를 죽여서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가난한 자를 잘 살게 해서 균등해져야 될 텐데 부자, 성공한 자를 죽이고 강탈해서 다 가난하게 만들어서 균등해지고만 것입니다. 가난의 예찬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세상 끝까지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 똑같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산이 있는가하면 골짜기도 있듯이, 높은 사람도 있고 낮은 사람도 있고,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는 것입니다. 잘 사는 사람도 있고 못 사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고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획일적인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50억이 넘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 다르고 50억의 손의 손금과 지장이 다 다르고 수많은 물고기의 형상, 새들의 형상이 다 다른 것입니다. 수천억만 개의 모래의 모양도 다 다릅니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다 똑같아야 된다고 합니다. 그것도 성공하고 잘 사는 사람처럼 나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같아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시기, 질 투, 증오심을 일으켜서 부르주아 계급을 타파하고 무산대중인 프롤레타리아가 주권을 잡아야 한다는 미명하에 사장의 자동차를 뒤집어엎고 불사르고 책상을 뒤엎고 죽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국의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의 폭력 데모가 바로 여기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스탈린이 4,500만명을 죽였고 모택동이 6,500만 명을 죽인 것입니다. 히틀러보다 천 배, 만 배 더 악한 짓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고,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물론, 국토방위나 정당방어를 위한 것은 근본이 시기, 질투나 증오심 자기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니까 제외됩니다. 성경에 폭력을 쓰는 자는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신명기 33장에 보면 모세가 죽기 전에 12지파를 축복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시므온은 축복에서 쏙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여동생 디나의 일로 세겜추장과 그 일족의 모든 남자를 다 칼로 죽이는 일에 주동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폭력주의자를 결코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공산주의는 무신론자들이요, 폭력주의자들이기 때문에 하나같이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가 금메달을 많이 따기 때문에 공산국가에도 스포츠가 있는 줄 알지만 국민에게는 스포츠가 없습니다. 즐기는 스포츠란 일체 없습니다. 금메달 따기 위해서 사람들을 골라다가 평생을 그것만 기계처럼 만들어 메달을 따게 하는 것입니다. 

 지난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북한이 금메달 10개를 땄다고 합니다만, 그 배후를 살펴보면 얼마나 끔찍한 피 흘림과 학대가 있었는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참다운 스포츠도 없고 예술도 없는 것입니다. 강제와 폭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자원하는 심령에서 연구도 하고 경쟁도 해야 발전이 있는 법인데 강제와 폭력으로 마지못해 일을 하고 연구를 하니까 발전이 없고 따라서 자유진영보다 경제도 뒤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2. 율법주의와 개신교 


 이스라엘 나라에 가서 성지순례를 하는 동안 유태교의 안식일(Shaba)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금요일 오전까지 성전 가까운 곳에 다 모여들었다가 그 이튿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걸음도 몇 걸음 이상 못 걷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머물렀던 호텔에도 금요일이 되자 유태인들이 아이들까지 데리고 모여들어 식당에도 바글바글하게 사람이 많았습니다. 걸음도 몇 걸음 이상 걷지 못하고, 불을 붙이는 일도 안식을 범하는 일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더운 음식도 팔지 않고, 전기 스위치 넣는 것도 불을 붙이는 것과 같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도 2층마다 자동적으로 섰다가 움직이도록 되어 있어서 관광객이 타는 엘리베이터는 그 옆에 따로 운행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 나라에 가서 공부하는 목사가 이웃 유태인 집에서 놀러오라고 해서 갔더니 무슨 요구가 있는 것 같은데 말을 하지 않더랍니다. 가만히 생각하며 살펴보았더니 냉장고의 전기 플러그가 빠졌더랍니다. 그래서 끼워주었더니 고맙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나 이 얼마나 형식주의(formalism)며, 의식주의 (ritualism)입니까? 형식은 필요하지만 형식주의는 잘못된 것이며, 의식은 있어야 하지만 의식주의는 나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생명력은 없어지고 참된 신앙도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도 이를 통렬히 비난하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신령(spirit)과 진정(truth)으로 예배해야 되는 것 입니다. 

 이번에 구라파를 방문하는 중에 뼈저리게 느낀 것은 어마어마한 예배당들이 건물만 남고 예배드리는 교인들이 없고 관광지로 변하고만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천주교는 말씀의 선포가 없이 의식적으로 미사를 드렸고 오랫동안 평신도는 성경을 읽지 못하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천주교는 눈의 종교요, 개신교는 귀의 종교라고 표현했습니다. 

 개신교도 거의 다 생명이 죽은 교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등의 기독교 국가는 종교세를 받아가지고 국가가 목사에게 봉급을 주고, 어떤 나라에서는(스웨덴) 설교범위도 정해주기 때문에 마음대로 설교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성령의 역사가 있을리 없고 열심히 기도하거나 전도해서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열정도 없기 때문에 교회는 거의 다 죽은 상태였습니다. 

 예를 들면,덴마크에서 유명한 그룬트비 목사의 기념 예배당을 가보았더니 정부에서 약 3,000명 좌석의 예배당을 지어주었는데 주일날 출석하는 교인들은 노인들 25명 정도랍니다. 

완전히 죽은 교회들이었습니다. 형식주의와 의식주의에 빠질 때 교회는 생명력을 잃고 죽고 맙니다. 한국교회가 죽은 교회를 살리는 일을 해야 될 사명도 있고 공산국가였던 나라들에 게 빨리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는 사명도 깨닫고 왔습니다. 


3. 믿음과 자원하는 심령 


 무신론과 폭력주의의 공산국가를 보고, 또 형식주의, 의식주의에 빠져 생명력을 잃고 죽어가는 나라들을 돌아보고 나서 “자원하는 심령”이 우리 영적인 생활과 신앙생활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깨달았습니다. 

 본문에 다윗은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2)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다윗 왕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 한 후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애통하며 회개하는 시 가운데 있는 말씀입니다. 죄는 엄한 율법으로도 막을 수 없고 국법으로도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범죄치 않고자 하는 자원의 심령”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미워하는 죄악 된 생각을 품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고 애원했던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속에 진심이 들어 있고, 중심이 들어 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형식주의와 위선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교도, 찬송도, 기도도 다 중심과 진심으로 하는 것이어야 하나님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원하는 심령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헌금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헌금의 원리는 ① 기쁨으로 해야 되고(출 25:2, 35:29), ② 최선을 다해야 하고(고후 8:3, 과부의 엽전 두 푼), ③ 자원하는 심령으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나 체면으로 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예물을 가져 여호와께 드렸으니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출 35:21)라고 했으며, “마음에 원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남녀마다…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 이러하였더라”(출 35:29)고 했습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오는 고로…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남음이 있나이다”(출 36:3)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감사헌금이나 건축헌금, 십일조, 선교헌금 등을 바칠 감화와 감동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순종하면 기적적인 축복을 받고, 성령을 소멸하고 자꾸 불순종하면 축복의 대열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항상 기도하고 규칙적으로 기도해야 되겠지만, 특별히 심령의 감동으로 금식기도, 철야기도나 어떤 기도를 하고 싶은 감화 감동이 올 때,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예비하신 축복을 주시고 닥쳐오던 환란과 시험을 막아주시고 이기게 해주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자원하는 심령은 대단히 귀중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1991년 8월 25일 주일 낮 대예배 설교>




  1. 19930131 가장 큰 죄 영적 간음

    설교 일자1993-01-31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2. 19930117 사랑을 숨기시는 하나님

    설교 일자1993-01-17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3. 19930110 바른 판단과 성공적인 삶

    설교 일자1993-01-10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4. 19930103 영광이 더욱 충만한 교회

    설교 일자1993-01-03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5. 19921227 축복을 위한 제일 생활원칙

    설교 일자1992-12-27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6. 19921213 인생에 가장 중요한 문제

    설교 일자1992-12-13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7. 19921225 축복받은 요셉과 마리아

    설교 일자1992-12-25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8. 19921206 영혼 구원의 사명과 그 축복

    설교 일자1992-12-06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9. 19921122 변명과 강권

    설교 일자1992-11-22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10. 19921115 결과를 예측하는 지혜

    설교 일자1992-11-15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11. 19921108 로마서에 나타난 인간론

    설교 일자1992-11-08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12. 19921011 한 문둥이의 모범적 감사

    설교 일자1992-10-11 설교 분류기타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 28 Next
/ 28

전체 메뉴 보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