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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둥의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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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자 1991-11-24
설교 분류 기타
설교 본문 마태복음 10장 34~39절
extra_vars6 ./pds/board/33/files/doc/911124-41. 진리편에 설 수 있는 용기.hwp

41. 진리편에 설 수 있는 용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8~39) 

 초대 교회 시대에 서머나 교회의 감독인 폴리캅(Polycarp)은 사도 요한의 친구이며 생도였는데 그 나라에서 기독교인을 핍박하고 죽일 때 지방총독이 그 감독을 존경하기 때문에 조용히 불러다가 그리스도를 욕하면 풀어 놓아 주겠노라고 강권했습니다. 그 때 폴리캅(Polycarp)의 나이가 86세였는데 그가 대답하기를 “86년 동안 내가 예수님을 섬겨왔는데 그는 한번도 나를 해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의 왕 나의 구세주를 모독하겠습니까?”고 대답하여 쇠사슬로 기둥에 묶여 불태워 죽임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참된 신앙을 지키고 진리를 따라 살 때 칭찬과 영광만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1. 진리를 따를 때 핍박과 고난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진리는 항상 단두대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따를 때 달콤한 축복만 있거나 칭찬과 갈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위협과 고난이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식구리라”(마 10:34~36)고 했습니다. 흑암과 죄악 가운데 살던 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빛의 자녀가 되면 부모 형제와도 불화가 생기고 핍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이시지만(사 9:6, 마 21:5) 그 평화는 비진리와 타협하거나 사단 마귀에게 양보하면서 화평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위한 투쟁이 있은 다음에 오는 평화요, 죄악으로 썩어가는 곳에는 수술하는 고통과 투쟁이 있은 후에 오는 화평인 것입니다. 불교의 상징인 불교 만(卍)자는 십자가를 굽힌 것이요, 타협하는 것이지만 기독교의 십자가는 곧은 십자가입니다. 즉 때와 장소를 따라 적당히 타협하고 굽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보다 세상의 친구나 부모 형제가 더 귀중해서 타협하면서 신앙과 진리를 굽히는 것은 주님의 뜻에 배치되는 것이며 참된 기독교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10:37~38)고 하셨고, 심지어 39절에“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은 자는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믿음의 절정을 지키고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버릴 각오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로마시대의 사형 형틀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은 죽은 각오, 사형당할 각오까지 하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 분쟁이 있을 때 부모나 자식이나 형제까지도 부인하고 집과 전토(막 10:29)도 버릴 각오를 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할 때 참 사는 길이 있고 하늘의 면류관과 영원한 상급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8절 이하에 핍박을 받는 서머나 교회에다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는데, 예수님을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했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2:10)고 말씀하셨습니다.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을 각오하고 신앙의 정조를 지키고 진리의 말씀을 굳게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을 지키고 진리를 따르기 위해서는 핍박과 고난과 죽음까지도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2. 진리 편에 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저는 요사이 존경해왔던 목사님이나 감독님들에게 전화하고 난 뒤 실망한 일들이 있습니다. 확실한 이단이요, 적그리스도의 종들이므로 이들을 신학교에서 척결하는데 동의를 구하고 청첩장에 이름 좀 빌리자고 하는데, 늙었다는 핑계대고, 관대한 지도자인 체하면서 뒷꽁무니를 빼는 것을 보고 어떻게 저런 양반들이 감리교에서 평생 목회를 하고 감독의 직책까지 맡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이때에 바로 잡아야 한다고 격려해 주는데 어떤 분은 도리어 그런 이단을 살리려는 운동까지 하는 것을 볼 때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소신대로 결판 내리지 못하고 비겁하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 주고는 “나는 죄가 없다. 너희가 이 피 값을 받으라”는 식으로 대야에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2,000년 동안 수십억 천만 명의 성도들이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외우고 또 외웁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분쟁을 피하려고, 인기를 잃지 않으려고, 적당히 좋게 지내려고 손을 씻는 무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은 30냥을 받아먹고 예수님을 팔아넘기고도 주님의 얼굴에 입 맞추는 배신자 위선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진리를 따르고 믿음의 정조를 지키려면 단두대 위에도 오르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 선지 450명과 아세라 선지 400명, 도합 850명과 대결하려고 갈멜산을 올라왔는데 소위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도 엘리야 편을 들어 나서는 사람이 없었고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 두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얼마나 고독하고 원통했으면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 18:21)하고 강하게 말하는 데도 중간에 선 채로 한 말도 대답지 아니했습니다.

 엘리야가 얼마나 고독하고 안타깝고 분통이 터졌겠습니까? 하나님께 대하여 남달리 열심히 특심했기 때문에 엘리야를 당대에 위대한 종으로 쓰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도 남달리 용감한 성격 칼날 같은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 어부였지만 수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북한 공산 치하에서 그렇게 많던 신학자들이 점점 핍박을 가하고 위협을 주니까 3분의 2 이상이 배신하고 타락하고 예수님을 저버렸습니다. 오죽했으면 목사인 강양욱이는 회유책에 넘어가 부수상까지 했겠습니까? 주님의 뜻에 맞는 귀한 그릇이 되려면 불신앙, 비 진리와 타협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사단을 대적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다시한번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면 사자굴 속에 집어넣어 죽인다는 어명을 알고도 지조를 굽히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하는 창문을 열어 놓고 전과 똑같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용기입니까? 결국 사자들이 잡아먹지 못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져 죽인다고 포고령이 내렸는데 굽히지 않았습니다. 왕이 이제라도 나팔을 불거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용서해 주마 하고 타일렀는데도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6~18). 얼마나 위대한 신앙의 용기입니까?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서 머리 한번만 우상 앞에 숙이면 죽지 않을 수 있었지만 굽히지 않고 순교한 사람이 천천 만만 세일 수 없이 많습니다. 초대교회 때도 황제를 “주여”하고 부르면 죽지 않는데 예수님밖에 주님이 없다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한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요, 저주받은 자라고 욕하면 살 수 있는데,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주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적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난다고 한 말씀대로 마리아가 낳은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고, 예수만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하면 천동설을 주장하는 것 같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가 각 종교에 다 있고 많은 그리스도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데도 가만히 보고만 있자는 것입니까?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이 그렇게 적중합니까? 마태복음 24장에 말세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마 24:23~25)고 했습니다. 말세에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Many Christ, The Christ가 아니라 a christ)가 있다는 것입니다. 

 변선환 학장이나 홍정수 교수 기타 이들을 동조하는 신학교 교수들이나 목사들은 바로 이 적그리스도의 종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 4:2~3)고 분명히 말씀했는데 이런 사단의 종을, 적그리스도의 종들을 그대로 두야 합니까? 

 더욱이 이런 자들을 옹호하는 교수들은 다 이단이요, 마귀의 자식이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짐승의 피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하고, 부활도 없다고 하는데 이보다 더 큰 마귀의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말세에 용기 있는 신앙을 갖지 않으면 666의 표, 적그리스도의 표를 받고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됩니다(계 13:16~18, 14:9~12,19:19~21). 디모데후서 2장 14~18절을 다시 명심하십시오.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그 적그리스도의 종들은 말싸움을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맡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믿음을 일으켜 세우는 일을 하지만, 사단의 종, 적그리스도의 종들은 부활이 없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면서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7~8). 

 더욱 놀라운 사실은 송길섭 전학장과 변선환 학장과 홍정수 교수 등은 통일교와 여러 해 동안 연루되어 왔고, 통일교의 거물급 인물이 이 교수들의 비호 아래 5년 동안이나 학적을 두고 활동하며 많은 사람들을 물질 공세로 포섭해 왔습니다. 그 영향으로 학부생이 중퇴하고 통일교신학교(성화)로 전학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쯤 얼마나 뿌리를 깊이 내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주님만 그리스도가 아니라, 모든 종교에 즉 통일교에도 문선명이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펴온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증인과 물증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 사람들을 두둔하고 살려둬야 되겠습니까? 

 말세에 이런 적그리스도의 유혹에 여러분 현혹되는 일이 없이 신앙의 무장을 하시길 바랍니다. 아멘. 

<1991년 11월 24일 주일 낮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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