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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둥의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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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고통은 왜 있는가? (예레미야애가 3 : 19~39)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거의가 다 이렇게들 말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왜 이렇게 불행과 고통이 있고, 또 그대로 보고만 계십니까? 그래서 저 공산당들은 왜 그냥 두어서 불안에 떨게 하고, 왜 홍수는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게 합니까? 왜 고칠 수도 없는 무서운 질병 속에서 고통을 당하게 내버려두십니까?”하는 의문을 지닌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불행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과 불행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아서 내버려두시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보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라”고 하신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고통과 환란이 있어지는 것은 우리 인생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고통은 왜 있고, 무슨 유익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찾고 믿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낮에 밖에 나가서 놀 때는 전혀 아빠, 엄마, 집 생각 안하고 재미있게 놉니다. 그러나 갑자기 위험한 일을 당할 때는 엄마! 하고 집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인간의 창조주가 되시고 축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되어 있는데, 배신하고 반역하며 제멋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고통과 불행에 직면하게 되면 그제서야 절대자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게 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자기만을 의지하고 살다가 절망에 처할 때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게 될 때,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부르짖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왕에게 고문을 당하고 고역을 받게 될 때 그제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편안하고 세상에 소망을 두었을 때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절망의 벽에 부딪히게 될 때 그제서야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면서 하나님앞에 항복하고 따르게 되는 것을 많이 보게됩니다.
 어떤 사람은 “저 여자와 결혼만 하면 예수를 믿겠습니다.” “저는 아들이 없는데 귀한 아들 하나 주시면 잘 믿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이 이루어 질 때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하고 잘 믿는 사람은 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편, 아내가 죽어 가거나, 철석같이 믿었던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또 사랑하는 자식이 고통을 당하고 죽어 가게 될 때, 그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께 찾아 나오는 사람은 오히려 많이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사업의 실패와 질병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게 된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도 평안하고 아무런 시험이 없었더라면 예수를 믿지 않았을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란과 고통이 그 당시에는 쓰리고 아프지마는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고 믿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을 향하게 되면 여러분에게 유익이요, 무한한 은혜와 축복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로 천국을 사모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칼빈(J•Calvin)은 “이 세상에 고통이 많은 것은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게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살기 편하고 행복하게 잘 살수 있다면 천국 같은 것은 있으나 없으나 찾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환란과 고통을 당하게 되므로 근심과 고통과 슬픔이 없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편안하게 살 때에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그리워하지도 않고, 돌아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압박과 고통을 당하게 될 때 그제서야 가나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눈물과 근심과 질병과 심지어는 죽음의 고통을 통해서라도 눈물이 없고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영원한 천국으로 우리를 몰아 넣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환란과 고통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세상에서는 고통을 받더라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면하고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과 복락을 누리게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백년 미만을 사는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당해도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훨씬 유익한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대부분의 환란과 고통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내 멋대로 살고 죄를 짓게 될 때 오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순종하고 제 멋대로 살다가도 고통이 닥치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도 많이 보게 됩니다. 시편기자는 시편 119편 67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라고 고백했고, 계속해서 71절에 보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당하는 질병이나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가 미워서 주시는 벌 값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통하여 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의 다윗도 젊어서 고난과 역경 속에 있을 때에는 오히려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평안할 때 늦도록 낮잠을 잔 후에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서 범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 여인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만 아들이 병들어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다윗은 자기의 죄를 뉘우치면서 일주일 동안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아들이 죽었음을 알고는 태연하게 슬픈 기색을 내지 아니하고 식사도 하고 나라도 보살피게 되었습니다. 그때 궁궐의 많은 신하들은 하나같이 놀랬습니다. 아주 이상할 정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내가 이 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누구를 탓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12장 6절 말씀에 보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책찍질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12장 8절에도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했고, 또 12장 11절에도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환란과 고통과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유익이요, 바로 깨닫는 자에게는 무한한 은혜요 축복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번째로 인내와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미국의 어느 잡지에 5천년 묵은 나무가 있다는 기사가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이 나무가 어떻게 오래 살았는가 하면 땅이 좋은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산 언덕에 바람이 부딪치고 바위가 많은 토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땅도 나쁘고 모든 조건이 나쁘지만 오히려 뿌리는 아주 깊이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무는 다른 나무들은 다 시들어 죽어도 죽지 아니하고 5천년이상을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대해서 평안하게 온실의 꽃과 같이 돌보시는 것만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온실에서 자란 꽃은 햇볕이 쪼이고 또 조금만 추위가 와도 금방 시들어 죽어버리는데, 이 온실의 꽃과 같은 사람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어떠한 환란과 시련과 역경이 오더라도 힘차게 이기고 참고 나갈 수 있는 그런 신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하나님 자신이 원하지 아니 하시지만 시련과 고통을 당하게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어느 곳에는 강물이 얼마나 물결이 센지 그 강을 건너는 사람은 누구나 다 바윗돌을 하나씩 짊어지고 간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바윗돌을 지고 가기는 힘들지만 빈 몸으로 건너가다가는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지고 건넌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도 평안하기만 하면 기도도 하지 않게 되고, 예배당에도 다니기 싫게 되고, 신앙의 자세가 나태해 집니다. 그러나 한번씩 풍랑이 일어나고 파도에 부딪치게 될 때에 하나님을 향하여 진정으로 부르짖게도 되고 믿음이 자라게 되고 그 심령은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토록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절망을 통하여 믿음과 기도로써 어떠한 환경이라도 이길 수 있는 인내와 힘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란 광야에까지 이르렀을 때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가나안 땅을 탐지한 정탐꾼을 12명 택해서 보내게 했습니다. 그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백성들 앞에서 보고하는데 10명은 모두가 다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보고하기를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또 사람들을 보니 키가 큰데 우리는 그들앞에 서면 메뚜기와 같습니다”하면서 근심하며 부정적인 보고를 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백성들에게 보고하기를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그러므로 문제없습니다. 쳐들어갑시다”하고 긍정적이고 용감한 보고를 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 보면 왜 우리의 밥이라고 했습니까? 밥이란 잘먹고 소화시키면 힘이 생기고 건강이 오게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하는 시험과 환란은 밥과 같아서 그것을 잘먹고 소화하기만 하면 힘이 생긴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일찍이 위대한 종들은 절망과 실망 할 수밖에 없는 고통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아직 이렇다 할 훌륭한 목사는 못되었습니다만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복음을 전하고 가는 곳마다 부흥회를 인도하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도록 쓰임을 받기까지는 제 나이에 비해 여러 가지 고통과 절망스런 일들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평안하게 아무런 고생도 없이 자랐다면 제가 여러분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자격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어떠한 환란과 고통이 밀어닥치게 될 때 어리석게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 시련과 고통이 지나간 다음에는 어떤 은혜를 주시려나이까?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어려운 시련을 당하게 될 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이구 난 예수를 잘 믿으려고 하는데 왜 이런 시험이 오나?” 하면서 참지 못하고 포기해 버리는 사람도 많이 보게됩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고 나면 오히려 더 시험이 오고 질병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러한 힘든 시련의 고비가 지난 다음에 축복을 주어야 그 은혜가 고마운줄 알고 그 축복을 받아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고통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① 회개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역대하 6장 14절 말씀에 보면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환란과 고통과 재난을 당했을 때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게 되면 그 환란과 고통을 제하시고, 치료하시고, 고쳐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② 십자가를 자원해서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의 아기를 억지로 보라면 정말 귀찮습니다. 그러나 제 자식을 안아 줄 때는 팔도 아픈 줄 모르고 힘든 줄을 모르고 즐겁게 잘 놀아 줍니다.
 여러분! 어차피 환란과 고통 당할 바에는 내가 자원해서 믿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자취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쓸데없는 불행과 고초는 면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고통과 고생이 있어질 바에는 믿음으로 축복받는 고생을 하자는 말입니다.
 모세가 공주의 아들이 되었을 때 장차 대 애굽의 황제가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리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을 자취하게 될 때에 어리석은 것 같았으나 놀라운 축복을 받았고 영원한 기업을 받은 사실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잘 압니다. 분명히 믿음으로 하는 수고와 고생은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갚아주시고, 그 대신에 다른 고난과 고통은 막아 주신다는 사실을 체험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③ 믿음과 기도의 생활을 미리 잘 해야합니다.
 어려운 고통과 시험이 올 때에 “아이구! 하나님 나를 살려 주십시요”하지 말고, 시험과 고통과 재난이 오기 전에 미리 믿음 생활 잘하고 기도 생활 잘하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만 아니라 내 가정을 위해서라도, 내 교회를 위해서도 나아가서 우리나라 민족을 위해서 정신차려 기도를 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나 하나만 잘 먹고 잘살겠다고 하면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가정과 나라까지도 말할 수 없는 어려운 수난을 겪에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홍수를 대비해서 방주를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방주는 삼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왜 삼층으로 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홍수가 나서 파도가 부딪칠 때 내려가 옆을 내다보니 무서운 물결만 보입니다. 이층에 올라가도 망망한 물결과 시뻘건 흙탕물만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무서운 물결 속에서도 삼층에 올라가 보니까 비로소 맑은 하늘이 보이고 하나님과의 언약이 생각이 나서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일층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육신의 생각과 눈을 말합니다. 즉, 우리가 환란과 고통의 홍수를 만날 때에 육신의 생각과 눈으로 보게 되면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층은 인간의 혼을 말합니다.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삼층에 올라와서 즉 믿음의 눈, 소망의 눈을 가지고 보게 되면 국가정세가 혼란하고 가정형편이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궁지에 몰렸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서 소망을 가질 수 있고,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란이 오고 고통의 홍수를 만날 때에 일층 즉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지 마십시오!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를 가지고도 해결하려 하지 마십시오! 영혼의 눈, 곧 믿음과 기도로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④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근심 걱정 불안 고통의 짐을 나 혼자 지고 고생했지만 이제는 다 하나님께 내어 맡겨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와서 근심의 죄, 죄의 짐을 다 맡겨 버리고 의지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그를 보살펴 주시고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⑤ 자기 중심의 생활을 버리십시요.
 여러분! 나 중심, 내 이기주의적인 생활을 하면 오히려 더 불안해지고 고통은 심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남을 위해서 살겠다고 할 때에는 마음이 기뻐지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의 사람은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 혹은 교인을 대하게 될 때에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나 혹은 교회를 위해 칭찬이나 존경보다는 희생하려는 한 알의 밀알이 되려 할 때, 그는 기뻐지고 그의 생애는 더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은 자기 중심의 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하면 좀더 내가 남을 돕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을까? 하는 거룩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마태복음 6장 33절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중심의 생활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겠다고 하는 그런 자에게 고통은 물러가고 진정한 평안은 오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 모든 말씀을 기억하시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축복 받는 생애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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