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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둥의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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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_vars1 <1979년 4월 15일 주일 낮 대예배 설교>
extra_vars2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6)

24.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
마태복음 28장 1~6절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6)
 오늘은 부활 주일입니다.금요일 날,예수님은 여러분과 나의 죄, 그리고 만인의 죄를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때에는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것 같았고 악이 선을 이기는 것 같았습니다.권력이 양심을 이기는 것 같았습니다. 미움이 사랑을 이기는 것 같았습니다. 사망 권세를 가진 사단의 세력이 생명의 주님을 완전히 이긴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밤이 지나고 부활의 아침이 왔습니다. 절망의 밤이 지나고 소망의 아침이 드디어 왔습니다. 거짓의 밤이 지나고 진리의 아침이 왔습니다. 불안과 공포의 밤이 지나고 평안의 아침이 왔습니다. 패배의 밤이 지나고 승리의 아침이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부활의 교리입니다. 모든 사도들의 설교 내용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공자도 살다가 죽어 흙에 묻혀 무덤에 머물러 있고, 석가도 살다가 죽어 흙에 묻힌 채 무덤에 머물러 있으며, 모하메드(Mohammed)도 살다가 죽어 무덤에 묻힌 채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에 가 보면 비어 있습니다.
 부활의 아침에 천사가 말한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한 그대로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도 살아 계서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부활과 영생을 믿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신앙이 없으면 그는 아직 구원도 받지 못한 사람이요, 참다운 신자도 아닙니다.
 여러분! 겨울 동안에 앙상하게 죽은 것 같던 나무가 봄이 돌아오면 다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핍니다. 우리가 땅에 심는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어 죽지 않습니까? 그러나 생명이 다시 살아나서 수십 배,수백 배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면서, 왜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죽음으로 끝난다고 생각하십니까? 꽃이 피었다가 떨어지면 열매를 맺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첫 열매가 나타나면 그 뒤를 이어 다른 열매들도 다 솟아나는 것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 됩니다.
 죽음은 우리의 절망이나 끝장이 아니라 강을 건너는 배와 같고, 하나님 앞으로 데려다주는 병거와 같습니다. 헌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과 같습니다. 죽음은 더 이상 우리의 원수가 아닙니다.
 벌 한 마리가 귀여운 어린아이에게 덤벼들어 쏘려고 하자 그것을 본 어머니가 그것을 가로막아 쫓아버리다가 그만 어머니가 벌에게 쏘였습니다. 그때 그 어머니는 “얘야, 그 벌은 어머니를 쏘았지만 이제 그 벌은 독침에 뽑히고 죽었단다.”라고 하면서 아이를 안심시켰습니다. 벌은 한 번 사람을 쏘면 독침이 뽑힙니다.
 사망의 독침으로 예수님을 쏘아 상처를 내었던 사단의 사망 권세는 깨어지고, 죽음의 독침은 뽑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사망아 너의 쓴 것이 어디 있느냐”고 외쳤습니다.
 부활이 우리 생각에는 그렇게 어려워 보이는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우리가 눈 깜빡하는 것보다 쉽습니다. 마치 전동차의 전진 기어를 넣었을 때는 앞으로 가지만 후진 기어를 넣으면 후진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우리의 몸이 죽어서 다 분해되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반대로 조립하시려면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생명으로 믿는 자는 죄에서 자유 함을 얻고, 영생을 얻습니다.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여 영원히 천국에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구름을 타고 승천하셔서 영영 떠나가 버리신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시고 어떤 환경에서도 승리하게 해주십니다. 그 중에도 특별히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신자들이 환난을 당한 곳에 살아 계십니다. 
 크리스천의 생활은 장미꽃밭과 같이 기쁘기만 하고 아름답기만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고통을 당하고, 때로는 환난에 직면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환난의 골짜기를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어린아이들이 마당에서 편히 놀 때는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다가도, 그 아이가 우물가에나 위험한 곳에 가면 후다닥 일어나 붙드는 것처럼 주님께서도 우리가 환난을 당할때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기도하는 장소에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보좌를 만질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앤드루 보나르(Andrew Bonar) 박사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분입니다. 어느 날 그가 미국에 왔을 때 무디(D. L Moody) 선생이 그의 성결한 생활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가 지극히 겸손한 태도로 말하기를 “저는 제 자신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원치 않습니다만, 저는 오십 년 동안 하나님의 보좌를 출입하며 살아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옳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실에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기도하는 사람이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서울에서 몇만 리 밖 미국에 있는 사람과 전화선의 연결 없이 대화할 수 있는데 하나님과의 대화가 불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과 늘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늘 주님과 영교 하는 생활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저의 집에서 조모님이 제일 먼저 예수를 믿었는데, 저의 조부님이 교회 다닌다고 얼마나 핍박을 했는지 문을 걸어 잠그기도 하고, 교회에 다녀오면 장작개비로 몹시 때리고 머리를 깎아 버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보자기를 쓰고서라도 계속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조모님이 예배당에 갔다 온 것을 알고 반쯤 죽도록 때렸는데 조모님은 간신히 몸을 끌고 부엌에 나가 저녁밥을 지으며 부뚜막에 앉아서 남편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랫목에 누워계시던 조부님이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듣자니까 그 소리는 자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도소리를 듣고 있던 조부님은 갑자기 마음이 180도 변해서 조모님을 들어오라고 해서,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그 후로 계속 신앙생활 잘 하시고 장로와 전도사까지 되었으나, 조모님은 젊은 나이에 일찍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조부님에 의하면 당신이 너무 많이 때려서 골병들어 돌아가셨다고 울면서 간증했답니다. 우리는 조모님의 얼굴도 함자도 잘 모르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한 알의 밀이 되어 희생되었습니다. 그 결과 손자대에 와서 우리 4형제가 다 목사가 된 줄 압니다. 
 기도하면 즉시 받거나, 몇십 년 후에라도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살아계신 예수님이 함께하십니다.


3. 예수님은 책임을 다 하시는 신자와 함께하십니다.
 로버트(Robert E. Lee) 씨는 말하기를 “의무(duty)는 영어에서 가장 숭고한 단어.”라고 했는데 기독교 용어 중에서도 책임과 사명이 가장 숭고한 단어 중의 하나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힘이 없고 비틀거리는 까닭은 너무 무관심하고 세상적이고 신자의 기본적인 의무를 감당치 않고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는 크리스천은 그리스도께서 동행하시는 체험을 할 수가 있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가장 위대한 기쁨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바로 그 장소에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계셨지만 그들은 다른 일로 분주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집에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는 단순한 의무도 감당치 않고 게으르기 때문에 범죄하고 타락합니다.
 하나님과 접촉하고 만나는 곳에 축복이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여 예배드리는 곳에 참석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만 가지 축복을 잃게 됩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무디 선생님께“교회에 꼭 나가야만 신앙생활을 합니까? 집에서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할 때 무디 선생은 그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고, 그 청년에게 난로에서 빨갛게 핀 석탄 한 덩어리를 끄집어내다가 저쪽 구석에 갔다놓으라고 했습니다. 얼마 안 가서 그 빨갛던 석탄이 검게 죽어갔습니다. 다시 난로에 집어넣었더니 다시 빨갛게 피는 것을 보여주며 왜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실물 교수를 했다고 합니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도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면서 산다는 것이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단이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마귀의 역사입니다.
 벌써 교회를 멀리하기 시작할 때부터 무엇인가 큰 잘못과 불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비록 떼돈을 번다해도 그렇습니다. 또 한 가지 기독교인의 기본 의무는 주님께 예배드리는 의무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인데 이 의무를 감당할 때 그리스도의 축복과 임재를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 외에 재능을 바치는 것, 정직하게 사는 것 등이 모두 기본 의무입니다. 기독교인이 의무를 감당할 때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 때까지 늘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4. 십자가를 지는 자와 예수님은 함께하십니다.
 예수님이 갈보리 산언덕을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서 자꾸만 쓰러졌습니다. 이때 로마 군인은 구레네 사람 시몬을 데려다가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습니다. 그는 그 덕분에 예수님을 만나고 그 후손들까지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한 청년이 열여덟 살 되던 해 생일에 아버지한테서 수십억 원 재산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청년은 이 많은 돈을 받아서 방탕한 일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술을 퍼 마시고 기생집에 다니며 수많은 여자를 농락하고 도박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삼십 세가 되었을 때 전 재산은 탕진되었고 건강도 잃어버리고 인간성도 다 잃어 버렸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말하기를 “만일 내 아버지가 나에게 돈을 한 푼 안 주고 억지로라도 일하러 가게 만들었다면, 나는 참다운 사람이 되고 지금의 나보다 몇 천 배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하고 탄식하더랍니다.
 크리스천은 고난과 싸울 때 강한 신자가 되고, 또 이 고난 가운데 부활의 주님이 동행하여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에어리아(Aeolian) 왕에게 하프를 하나 선사했습니다. 그런데 이 하프는 바람이 불 때만 아름다운 선율을 자아낸다고 했습니다. 왕은 음악을 듣기 위해 하프를 창밖에 내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신선한 봄바람이 불어와도 음악이 안 들리고 부드러운 여름 바람이 불어와도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아름다운 음악소리에 잠을 깨어보니 때는 겨울이요,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겨울바람이 그 하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극심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 우리 영혼 깊은데서 가장 좋은 것을 나타나게 해주십니다.

 

5.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때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텍사스(Texas)에 한 불량자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교회에 다니는 귀여운 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만 그 어린 딸이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 사람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 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다윗의 아들이 죽었을 때 한 말씀, 즉 “나는 그 아이를 돌아오게 할 수 없고 내가 그에게 갈 수는 있다”는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이때 이 남자는 죄에서 돌이켜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훌륭한 교인이 되었습니다. 후에 그가 간증하기를“내가 슬픔의 골짜기에 있을 때, 내 영혼의 구주와 마음의 위안을 찾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필포트(Philpot) 박사에게는 아홉 살 된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중병으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의사가 그 아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이가 죽기 전에 필포트 박사는 한 번 더 아들을 보러 들어갔습니다. 중환자실이라서 아무도 못 들어가고 혼자서 흰 모자를 쓰고 흰 가운을 입고 마스크와 장갑을 끼고 들어갔습니다. 처음엔 아이가 아빠를 몰라 보더니 나중에야 겨우 알아보고 “아빠! 나한테 뽀뽀 안해 줄래요?”그때 아버지는 “얘야 아빠는 너한테 뽀뽀하고 싶은데 의사가 지금은 하지 말란다. 그렇지만 이다음에 언젠가는 뽀뽀해줄 날이 있을 거야.”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아들 더니(Donnie)는 “내가 죽게 되나요?”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아빠는 놀래주고 싶지 않아서 “왜 죽는 것이 무섭니?”그랬더니 그 아이가 대답하기를 “아빠, 오늘 아침에 누가 나는 죽을 거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아서 무서웠어요,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나에게 ‘더니야 무서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마’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 다음부터는 무섭지 않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더니는 죽었지만 필포트 박사는 가족들에게 울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두려워 떨지만 예수를 믿어 구원 얻은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죽는 순간에도 예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사는 동안에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고 죽을 때에는 우리 성도들을 천국으로 데려가십니다. 이 예수님을 당신의 구주로 믿습니까?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이것처럼 큰 비극은 없습니다. 이 시간 결단을 내리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예수님께 드리십시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으니 여러분, 이 시간에 마음속에 예수님을 분명히 믿고 영접하셔서 영원히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변함없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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