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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둥의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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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_vars1 <1987년 11월 2일 주일 낮 대예배 설교>
extra_vars2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20:35)

1. 신자와 관용의 생활
사도행전 20장 35절, 빌립보서 4장 5절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20:35)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불신자들보다 더 마음이 좁고 인색하며 째째하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싸웠다가도 같이 막걸리 한 잔 마시면 얼른 풀어 버리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한 번 틀리면 잘 풀지도 않고 또 돈을 쓰는데도 인색하고 마음이 좁다고 하는 얘기를 흔히 듣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조심스러운 생활을 하다 보니까 마음도 시원스럽지 못해 보이고 돈도 불의한 방법으로 벌지 못하니까 쓰는 데도 자연히 크게 쓰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마음이 더 넓어야 하고 관대해야 합니다.
 성경은“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 4:5)고 했으며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했습니다.
 관용(generosity)이란 말은“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마음을 넓게 쓰고 용서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신자들은 물질을 쓰는 데나 사람을 대할 때 관용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제법 마음이 너그러운 것 같다가도 물질 문제에 들어가면 조금도 양보가 없고 하나님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관용할 줄 모르는 이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돈을 몇 천만 원이나 몇 억 원이라도 아까운 줄 모르고 쓸 줄 아는데 도무지 남을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관용하는 사람은 물질도 양보할 줄 알고 남을 넓게 용서할 줄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즉 관용이란 어떤 사람의 기대 이상으로 베푸는 마음입니다. 꼭 의무나 기대하는 것만 이행한다면 관용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의무와 기대 이상으로 베풀 때 관용이라고 할 수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6~4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관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모범적인 관용을 보여준 사람들

 ① 바울
 사도 바울은 엄격한 바리새인으로 자기 자신만 알고 자기 신앙만 옳다고 주장하는 마음이 좁고 독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생활이 변화된 다음부터는 바울의 마음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활짝 열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다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떤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바울을 돌로 친 다음 죽으라고 버려두고 갔는데 후에 살아나서 그 사람들을 찾아가 봉사하는 일을 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22)라고 한 것처럼 바울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다 하고자 하는 너그러운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부자를 만나면 부자처럼 대하고,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가난한 사람처럼 대하고, 자유한 자에게는 자유한 사람처럼, 종들에게는 종과 같이 되고, 갇힌 자에게는 갇힌 자들처럼 되어서 모든 모양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자신을 내어주는 관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② 선한 사마리아인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한 유대인이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구원해 줄 줄로 기대했던 레위인도 제사장도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물질이나 생명을 돌보지 않고 그 사람을 돌봐주고 구원해 주었습니다(눅 10:30~37). 사마리아 사람은 사실 유대인들에게 개나 돼지 취급을 받고 멸시받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유대인을 증오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사랑으로 대하고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③ 예수님
 예수님 앞에는 협소한 마음이나 편견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너그럽게 내어준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나라 사람이건, 어떤 신앙을 가진 사람이건 필요하다면 즉시 머물러 도와주었습니다. 한번은 음행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려 와서 돌팔매에 맞아 죽게 된 죄 많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돌질하려고 했으나 그때 예수님은 땅바닥에“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요 8:7)고 쓰시고 계속해서 거기에 모인 각 사람의 죄를 쓰셨는데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일으켜 세우시면서“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의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당장 열두 명도 더 되는 천군 천사를 불러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으나 끝까지 십자가에서 참고, 참고, 참으셨으며, 주고, 주고 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시간도 생명도 피도 다 내어주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른다면 이런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2. 어떤 사람에게 관용할까요

 ①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때때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인색하고 관용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사람은 사회생활에서는 관대하고 가정에 들어 와서는 인색하고 옹졸하게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업가들의 잘못은 못 본 체 하면서 집안 식구들의 작은 잘못은 개와 같이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확실히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다른 사람들보다 집안 식구들에게 좀 더 관대해야 합니다.

 

 ② 원수들에 대해서
 우리를 해치고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관용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시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하는 사람들을 빨리 용서하는 법을 배우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나타내 보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할 때 세상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눅 23:34)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원수를 위하여 이렇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자기 노예를 몹시 때리고 있었습니다. 화가 잔뜩 나서 노예에게 말하기를“어디, 예수 그리스도가 너에게 무엇을 할 수 있나 보라”고 할 때 그 종은 대답하기를“주인님, 예수님은 나에게 당신을 용서해 주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입니다.
 스텐턴(Edwin M. Stanton)이란 사람은 링컨 대통령의 가장 미운 원수였습니다. 그는“고릴라 같은 대통령을 왜 아프리카로 보내지 않는지 몰라?”라고 혹평까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링컨 대통령이 전쟁을 위한 보좌관이 필요할 때 스텐턴이 가장 자격을 갖춘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지명해서 그 자리에 앉혔습니다. 이 관용하는 마음이 스텐턴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링컨이 사망했을 때 스텐턴이 말하기를“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통치자”라고 칭찬하면서 슬퍼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원수를 진정으로 이기는 방법은 관용을 베푸는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코리아나 호텔에 각 교단의 교단장과 시내 큰 교회 목사님들을 초청하기에 갔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깡패, 불량배들을 잡아다가 순화 교육을 시켰는데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한 200명 된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을 교회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한 사람씩 데려다가 보살펴주어야 되지 않겠는가? 교회에서 광고해서 예수 믿는 실업가들이 맡아서 그런 사람을 한 교회에서 한두 사람씩이라도 맡아 주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부탁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참 좋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라가 하지 않아도 교회가 그런 일에 앞장서야 할 텐 데 깡패와 불량배들을 나라가 먼저 없애려고 노력하는데 교회가 협조 안 해서는 어떻게 하겠느냔 말입니다. 사실 깡패와 불량배들을 바로잡는 일은 큰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들이 마음잡고 바로 살려고 노력하는데 교회가 그들을 받아들이기에 좀 괴롭더라도 관용을 베풀어서 그들을 바로잡아야 될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10번 데모하는 것보다 그런 사람 한 사람 데려다가 순화시키고 바로잡는 것이 정말 기독교가 해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③ 경쟁자들에 대해서
 두 사람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며 상점을 가지고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쟁을 하다 보니까 서로 미워하고 말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뭔가 바로잡고 싶어서 이 문제를 가지고 목사님을 찾아가서 상담을 했더니 목사님이 대답하기를 “그 사람을 이기는 방법은 당신의 고객 중에 당신의 가게에 물건이 모자라는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을 그 건너편 가게로 보내십시오”라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 충고를 받아들이고 가서 마침 자기 가게에 없는 물건을 찾는 손님이 있어서 친절하게 그 건너편 가게로 안내해서 보내주었습니다. 이 관용하는 마음이 마침내 그 경쟁자의 마음을 녹여서 그 다음부터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영국에 어느 대학에서 1등, 2등 다투는 학생 둘이 있었습니다. 1등 하는 사람은 동양인이고 2등 하는 사람은 영국 사람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조금의 점수 차이로 동양 사람이 1등만 합니다. 영국 사람의 친구들은“야, 너 어떻게 해서든지 1등 좀 해봐라”고 늘 얘기했습니다. 한번은 늘 1등만 하던 친구가 며칠 동안 계속 학교에 안 나왔습니다. 그래서 2등 하던 영국 친구가 알아봤더니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그의 친구들은“야, 잘됐다. 이번에는 네가 일등 하게 생겼구나”라고 좋아들 했습니다. 나중에 학기가 끝나니까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학교에 못나왔던 그 학생이 또 1등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에 그가 일어나서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내 경쟁자가 꽃다발을 가지고 와서 위문해 주었고 학교에서 공부한 것을 전부 필기해서 날마다 찾아와 나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랬었기 때문에 내가 병원에 누워 있었어도 나는 공부를 다 할 수가 있었고 또 1등이 되었습니다. 난 공부벌레가 되어서 성적은 좋았지만 인격적으로는 저 사람이 나보다 몇 배 나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얘기할 때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2등 하던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교리적으로나 교파적으로 좀 다른 신앙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단이 아니라면 꼭 나와 같은 신앙이나 교파를 가지지 않았어도 그들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어떤 교회는 꼭 자기 교파만 구원이 있고 다른 교파는 구원도 없고 이단이고 지옥 간다고 교인들을 잘못 가르치는 곳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만 천국 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친구보고“너 나가는 교회에 가면 천국에 못 간다”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너의 어머니는 어떻게 하지? 너의 어머니도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 교회 교인이었는데”라고 얘기했더니 아무 대답도 못하더랍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을 고집하는 면도 있어야 하지만 지나쳐서 꼭 나와 같이 믿지 않으면 다 멸망 받을 사람으로 취급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관대해야 됩니다.

 

 ④ 반대하는 사람에게
 어느 대학 교수가 한번은 무디(D. L. Moody) 선생이 설교하는 것을 듣고 나더니 예배가 끝난 뒤에 찾아가서 말하기를“무디 씨, 당신이 오늘 설교하는 중에 영어가 38번이나 틀렸습니다”라고 했더니 무디 선생은 겸손히 대답하기를“네, 저는 더 많이 틀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만큼 교육을 못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내 모든 지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나를 반대하고 비난하는 사람을 같이 비난하지 말고 넓게 대해 줘야 좋은 것입니다.

 

3. 왜 우리는 관용해야 될까요

 

 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하나님께로 오지 아니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양의 은혜와 복을 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손을 떼신다면 우리는 살지 못합니다. 여러 세대를 거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산과 건강과 지식과 힘을 주셨습니다.
 한 그리스도인 의사가 한 젊은이를 치료해 주면서 혹시 예수를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젊은이는“아니요, 선생님 저는 그런 엉터리는 안 믿습니다.”그래서 의사가 대답하기를“사람이 무엇을 믿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당신도 건강하게 될 것을 믿으십시오. 아마도 당신은 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정맥 속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피도 들어가 있기 때문 입니다”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덕택입니다. 하나님이 관용하셨으니 우리도 관용해야 됩니다.“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어느 날 빚진 자가 탕감받는 데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마 18:23~34). 수십억 원 빚진 사람이 탕감 받고 용서받고 나가더니 몇 십만 원 자기한테 빚진 사람을 만나서는 용서하지 않고 멱살을 잡고 옥에 집어넣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관용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많은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관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② 우리는 청지기들이기 때문입니다.
 청지기는 재산을 위탁받아서 다른 사람을 위해 쓰는 사람입니다. 정직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맡아서 자기 자신만 위해 쓰지 않고 주인을 위해서 바로 쓰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는 다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생명도 지식도 물질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루아침에라도 다 거두어 가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이 아이들은 내가 낳은 내 자식들이야,이 돈은 내가 피땀 흘려 번 내 돈이야, 내 돈이니까 내 맘대로 해야 돼”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태도를 취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다 청지기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바치고 하나님의 뜻대로 써야 하는 것입니다.

 

③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베푸는 관용이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합니다. 그 뿐 아니라 그 관용이 한 모범을 보이는 것이 됩니다. 어떤 어린 소년이 주일날 50원 헌금을 하고 나서 다음 주일날 선교사님에게“내가 당신한테 50원을 헌금했는데 그것 가지고 뭐했는지 보여 주십시오”라고 하더랍니다. 어떤 사람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좁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가 있습니다.
 크리미아 전쟁 때에 까만 양처럼 말 안 듣는 못된 병사가 있었습니다. 벌을 아무리 세게 줘도 안 되고 무슨 방법을 다 써도 도무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의논 했더니“관용을 베풀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했습니다. 큰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해 주고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그 후에는 그 부대에서 제일 훌륭한 병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물질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줄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에만 매달려서 자기도 머지않아 죽는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관용을 베풀 때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④ 관용은 우리 자신을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듭니다.
 사람에 대해서나 물질에 대해서 관대한 사람은 영혼이 강건해집니다. 향수를 병에다 담아 둔 채로 두고는 향내를 발할 수가 없습니다. 사해 바다와 갈릴리 바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사해는 흘러나가는 데가 없어서 죽은 바다가 된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계속 흘러나가서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합니다.
 이기심 때문에 심령이 병들고 메말라 가고 있으며 세상에서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가 하도 하나님께 바치기를 좋아하여“어떻게 그렇게 아낌없이 바칠 수가 있느냐?”고 물으니까 그가 대답하기를“내가 삽으로 떠내면 하나님도 삽으로 퍼 넣어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보다 더 큰 삽을 사용 하십니다”고 대답하더랍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몹시 미워하는 원수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그림을 그릴 때 그 원수의 얼굴을 그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이란 작품에서 배신자 가룟 유다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의 마음속에 증오심이 자기 예술을 망쳐 놓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을 그리고 나서 그 원수를 찾아갔습니다. 용서하고 화해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야 힘있게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관용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도 좋게 하고 자신도 더 좋은 신자가 되게 합니다. 심령이 강건해집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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