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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둥의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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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_vars1 <1982년 2월 21일 주일 낮 대예배 설교>
extra_vars2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그리아니 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23. 평안할 때의 순교
다니엘 3장 13~18절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그리아니 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순교란 신앙을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믿음의 절개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최고봉은 순교 이며,이 다음에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상급을 받고 가장 큰 영광을 누리는 사람도 순교자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란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고 말씀했습니다.
 어떤 분은‘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순교의 피가 많이 흘려진 곳에 생명이 사는 역사가 많이 일어나고 교회가 부흥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크게 부흥되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값 싸게 이야기 하지만 많은 순교의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대원군 때로부터 시작해서 일정 때와 6·25를 전후한 공산 치하 때 수많은 목사와 교인들이 순교를 했기 때문에 그 많은 순교의 피가 오늘날 한국 교회 부흥의 씨앗이 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순교가 가장 고귀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순교를 자청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1. 참된 신앙은 순교적입니다


 훌륭하고 참된 신앙은 순교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벨론에 잡혀 온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하지 않은 죄로 끌려왔을 때 왕이 타일렀습니다.
 “너희가 고의로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모든 악기가 울려 퍼질 때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만일 그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면 극렬한 풀무 불에 던져 넣어 타 죽게 되리라 알겠느냐”했더니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기를 “왕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즉, 이 말은 “왕이여 그 되지도 않은 말하지도 마시오. 그렇다고 우리가 우상 앞에 절할 줄 아십니까?”하는 뜻입니다. 얼마나 용기 있고 담대한 말입니까?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만일 그럴 것이면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즉, 이 말은“아무리 신이 우리를 풀무 불에 태워 죽이려고 해도 살아 계신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건져내실 수가 있습니다.”하는 강한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의 말씀이 더욱 위대한 신앙의 말입니다.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즉, “하나님이 풀무불 속에서 살려 주지 않고 죽도록 내버려둔다고 해도 우리는 신앙의 절개를 굽힐 수가 없습니다. 죽일테면 죽이십시오.”하는 말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신앙입니까?순교적인 신앙입니다.
 결국 풀무 불을 7배나 더 뜨겁게 해서 이 세 청년을 풀무불에 던져 넣었으나 웬일인지 그들을 집어넣는 사람들은 타 죽었으나 이 세 사람은 옷자락 하나도 타지 않고 머리터럭 하나도 타지 않고 빙글 빙글 돌아 다녔습니다. 그 뿐 아니라,세 사람이 아니라 인자 같은 이가 또 한 사람 있어서 네 사람이 돌아 다녔습니다. 결국 이 순교적인 신앙이 풀무불도 이겨냈던 것입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은 역시 이런 용기와 굳은 절개를 가져야 할 줄 압니다. 이런 신앙이 아니고는 오늘날도 마귀를 이기고,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니엘도 그와 같은 순교적인 신앙을 가졌던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메데와 바사가 정복하고 다리오 왕이 치리할 때에 다리오 왕이 세 총리를 두었는데 다니엘이 하도 훌륭해서 왕의 총애를 받으니까 다른 총리들과 방백들이 이를 시기 질투하여 다니엘을 고소하여 없애자고 하였으나 워낙 깨끗하고 고결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 아무 흠이나 허물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계략을 만들었습니다. 왕에게 아첨하면서 “앞으로 한 달 동안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하시기 바랍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법령으로 만들어서 거기에 어인을 찍어 전국에 포고했습니다.
 이때 다니엘은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다시 말하면 기도하다가 발각되면 사자굴 속에 던지운다는 것을 알고도 전에 해오던 대로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웬만하면 이 한 달 동안은 창문쯤은 열지 말고 숨어서 기도하자 한다든가 하나님도 인간의 사정 아실테니 이불 속에 들어가서 숨어서나 기도하자고 했을 터인데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신앙을 지키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사자굴 속에 던지워졌으나 천사가 다니엘을 지켜 주어서 사자들이 입을 봉한채 잡아먹지 못했습니다. 다리오 왕은 밤새 잠을 못 자고 슬퍼하다가 새벽에 일어나서 슬피 소리질러 묻기를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하고 물었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게 해서 살아났다고 하자 다리오 왕은 기뻐서 다니엘을 구출해내고 그 계략을 꾸민 사람들을 그 가족과 함께 사자굴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들이 굴속에 떨어지자마자 사자는 그 뼈까지 부숴뜨려 먹어버렸습니다.

 

2. 평안할 때의 순교 


 기독교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 가운데도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했습니다.
목 베임을 당하거나, 끓는 기름 가마에 던지워지거나, 화형을 당하거나, 심지어 산 채로 온 몸의 껍질을 벗기워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고 용감하게 순교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순교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사화가 그 좋은 예가 아닙니까? 한강변에 있는 절두산도 바로 목 베어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곳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박해와 핍박이 있을 때만 순교의 신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평안할 때도 순교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평안할 때 순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날마다 죽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봅니다. 순교하는 것은 한 번만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죽으면 그만이지만 안일하고 평안할 때 죄와 타협하지 않고 순수한 신앙을 날마다 해 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나 여러분이 잘 아는 살아 있는 순교자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일정 때 일제 탄압에 항거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항거하다 많은 옥고를 치루고, 많은 고문을 당하고, 많은 고생을 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글을 읽고 많은 사람이 은혜도 받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지금은 좋은 나라에서 평안히 잘 살게 될 때 중상모략인지 모르겠으나 빌딩도 가지고 있고 많은 재산을 모으며 안일하게 살면서 옛날처럼 기도도 안 하고 교회도 부흥이 안 되고 그렇게 감화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느낀 것은 박해 때 순교 정신을 가지고 신앙을 지키는 것보다 평안하고 안일할 때 그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날마다 죽는 생활을 하기란 더 어려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서운 박해의 마귀보다 달콤하고 안일한 마귀를 물리치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오늘날까지 조심하면서 기도하는 제목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 교만하지 않게 하옵소서(겸손). 둘째, 육신의 정욕으로 범죄치 말게 하옵소서(이성). 셋째, 물욕도 버리게 하옵소서(탐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과 결심대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물욕과 탐욕에 치우치면 하나님 뜻에 맞는 신령한 목사가 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사느라고 20년 목회하고 부흥회를 다니면서도 저금통장 하나 없이 땅 한 평 집 한 칸 마련하지 않고 헌신하면서 살아왔습니다마는 그 절개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잘한다는 말보다 어리석은 짓이라고 노후 대책과 만일의 사고를 위해서도 저축할 수 있는대로 저축하면서 살아야 된다고 합니다. 때로는 ’만일 내가 갑자기 죽으면 이 처자식들은 어떻게 하나’하는 의심과 불안이 마음에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님이 내 마음에 들려주시는 음성은‘박해시대에는 많은 사람이 목 베임을 당하고 화형을 당하고 총살도 당했는데도 그 순교보다는 낫지 않느냐 평안할 때도 순교의 신앙으로 살아라’하는 말씀입니다.
 안일하고 평안할 때에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날마다 죽는 생활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평안할 때에 순교의 신앙으로 산다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부흥회를 다니다 보면 혹 이성의 유혹이나 시험을 느낄때가 있으나 그때도‘남들은 순교도 하는데 죽어야 한다.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라 그 시험도 이길 수가 있게 됩니다.

 

3. 순교적 신앙이 왜 필요한가.
 
 ① 참으로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죽을 각오를 하고 신앙생활을 할 때 참으로 사는 길이 열립니다. 영혼이 사는 길 뿐 아니라 육신도 참으로 사는 길이 열립니다. 죽어야 할 때 죽지 않는 것은 죽는 것이요, 죽어야 할 때 죽는 것은 참으로 사는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다니엘도 사자굴에 들어가 죽을 각오를 했을 때 도리어 사는 길이 열렸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풀무 불에 들어갈 각오를 했을 때 도리어 살아났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도 이 순교의 각오를 해야 제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주일 성수하는 것도 십일조 생활하는 것도 순교의 각오를 해야 할 수 있고 기적도 축복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주일 지키기가 아무리 힘들어도, 십일조하기가 아무리 어려워도 순교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그런 각오로 믿음 생활을 할 때 참으로 사는 길도 축복받는 길도 열리게 됩니다.

 

 ② 많은 사람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내가 살 뿐 아니라 남도 살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희생의 제물이 되심으로 많은 죄인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처럼 우리들도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희생하고 헌신할 때에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가 있고 살리는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순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 되어 교회가 부흥되듯이 평안할 때에도 순교의 신앙으로 희생하고 헌신할 때 그 교회가 부흥되고 지옥에 떨어질 많은 영혼을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때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희생적으로 용감하게 요단강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에 강물이 갈라지면서 뒤를 따라 백성들이 건너게 되었고,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 한 가운데에 굳게 버티고 서 있을 때 많은 사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지도자들이 죽음의 요단강에 굳게 버티고 서 있을 때 그만큼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희생과 사랑이 없이 생명을 살리는 일도 있을 수 없고 성장과 발전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린 애기나 식물도 희생과 사랑이 있어야 잘 살고 성장 발전이 있듯이 교회도 희생과 사랑이 있어야 부흥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안할 때에도 순교의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라북도에 하리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에 문형우 집사님이라는 분은 자기 논을 다 팔아 교회를 새로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턱까지 짓다 돈이 없어 더 이상 짓지를 못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 신문을 보는데 오늘날은 과학이 발달해서 눈도 이식수술을 할 수 있다는 광고란을 보고 즉시 문 집사는 전주 예수 병원에 가서 “지금 저희 교회를 짓다가 돈이 떨어져 그러니 내 눈을 팔겠으니 눈 살 사람에게 내 눈 하나만 팔아 주세요.”라고 부탁할 때 그 원장과 모든 의사들이 감동을 받고 당장 자기들이 헌금해서 도와주고 또한 미국에도 편지를 보내서 한국에 이렇게 자기 눈을 팔아서 교회를 짓는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것을 위해 헌금을 해줄 사람이 없습니까? 도와주십시오, 했습니다. 그래서 한 미국사람이 헌금을 해줘서 예배당도 다 짓고 논 세 마지기를 팔았는데 여섯 마지기를 사 주었다고 합니다. 죽고자 할 때 자기도 살고, 남도 살고, 교회도 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목사나 교인들이 순교적 신앙만 가지고 있으면 교회는 부흥하게 되고 예배당 짓는 것도 문제가 없습니다.

 

 ③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신자들에게 소금과 빛이 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어 주고 썩어 가는 역할을 다 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희생과 헌신으로 자신이 죽는 길 밖 에 없습니다. 소금이 녹지 않고 어떻게 맛을 냅니까? 촛불이 자신을 태우지 않고 어떻게 빛을 발할 수가 있습니까? 말만 가지고 사회 정의나 사회 참여니 떠들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의 각오로 살아야 합니다.
 이경재 감독님이 공주에서 목회할 때 동창이 찾아와 식목일 날 산하나 전부를 식목 해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왜 우리에게만 식목을 많이 시키느냐고 물었더니 “작년에 식목일 날 사람들을 동원해서 나무를 심게 했더니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서로 경쟁을 해서 무성의하게 심어 나무가 다 말라 죽었은데 교인들이 심은 나무는 다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무가 다 살려면 교인들이 심어 주어야 합니다.”라고 부탁을 해서 정성껏 심어 주었다고 합니다.
 지난 주간 AFKN TV 방송에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영화를 몇 차례에 걸쳐 상영했습니다. 킹 목사는 흑인 목사로 미국의 인종차별을 항거하는 운동을 일으키고 나 선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인권을 가졌고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외쳤습니다(equal rights, equal opportunity). 그리고 언젠가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 때가 오는데 그것은 사람의 겉모양이나, 피부의 색깔에 의해서 판단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중심과 그 인격에 의해 판단 받는 때가 온다고 인권 운동을 하고 나선 사람입니다. 그는 감옥에도 여러 번 갇혔고, 매도 많이 맞고,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킹 목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설교하고 그 운동을 하다가 결국 백인의 총탄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그는 생전에 노벨 평화상도 탔습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에게 큰 자각을 주었고 흑인들은 노예 해방을 선언한 아브라함 링컨 다음에 마틴 루터 킹 목사를 현대의 링컨으로 숭배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고 복되게 하는 것도 순교의 각오가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고 희생하고 헌신할 때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위대한 인물이 될 수가 있습니다. 순교의 정신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의 가정, 직장, 우리의 교회, 나아가서는 우리나라가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날 순교적인 각오를 가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언제나 순교적인 생활을 몸소 실천하여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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